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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방의 문화생활/영화 모아보기

오오 워킹맘, 그것은 고통 - <인턴(The Intern)>(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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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일하는 근무지엔 워킹맘들로 수두룩하다. 장애학생들의 활동을 보조하는 '특수교육실무원'들 20여 명 중 한두 명을 빼면 모두 남편과 자녀들을 먹여 살린다. 하루 8시간, 주5일 근무로 떨어지는 돈은 많아봐야 150만원 남짓이다. 오후 4시40분 함께 퇴근할 적이면 단골로 나오는 대사가 있다. "오늘 뭐해 먹지?" 그렇다. 이들은 직장일 말고도 할 일이 산더미다. 집으로 돌아가면 식구들 먹일 밥상을 차린다. 밀린 빨래며, 청소며 하면 어느새 밤 여덟 시, 아홉 시를 훌쩍 넘긴다. 낮에 학생들 밥 먹이고, 똥오줌 가리는 것 도와주고 난 피곤함이 몰려온다.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을 뿐인데 스르르 졸음이 밀려든다. 피로에 포획당한 40대 중년의 삶이 저문다. 영화칼럼니스트 김세윤이 라디오 방송에서 '40대의 시절'을 이렇게 정의내렸다. "'40대'는 예술영화로 정의내릴 수 있어요. 아주 지루하거든요."


친분 있는 워킹맘 A씨는 전문대를 졸업한 뒤 곧장 무역회사에 취직해 20대를 보냈다. 30대의 첫 무렵에 결혼에 골인하고, 뒤이어 아들내미 하나, 딸내미 하나를 차례대로 낳았다. 애 키우느라 다니던 직장을 포기했다. 그런데 자영업 하는 남편의 벌이로는 키우기 만만찮았다. 독서실 카운터도 보고, 떡집 알바도 하고, 이 일 저 일 가릴것없이 생계 전선으로 출정했다. 메뚜기 뜀박질하듯 일하다 우연히 시교육청 홈페이지에 '특수교육실무원' 채용 공고가 떴단다. 이 땅의 '경력단절여성'들에겐 이런 일자리야말로 희소식이다. 10여 년 만에 펜을 들고 줄 그어가며 이론서 공부를 했다. 필기시험을 치르고, 실기 면접도 봤다. 경쟁률 2~3대 1이었지만 '혹시나 떨어지면 우얄꼬' 하며 노심초사했단다. 다행히 붙었다. 결과가 발표된 날, 그리 기쁠 수가 없었다.


우리네 세상에서 여성들이 온전히 일하기란 하늘에 별 따기다. 올해 1분기 기준으로 우리나라 여성들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56.9%다. 남성(78.2%)에 비해 21% 가량 낮은 수치다. 남녀의 임금격차 또한 37%로, OECD 평균 15%에 비해 두 배 정도 큰 차이를 보인다. 미국(19%)과 일본(27%)보다 심각하다. 가깝게는 이태영 박사부터 저 멀리 크래프트, 보부아르, 도러시 데이까지 숱한 여성운동가들이 여권을 신장시키려 헌신했다. 그럼에도 유독 '노동현장'에서 여성들의 삶은 처연하다. 우리만 그런 줄 알았는데, 영화 <인턴>을 접하니 '만국공통인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다, '역시나 아직까진 그렇구나' 하고 끄덕인다.


'워커홀릭' 줄스 오스틴(앤 해서웨이 분)은 지난 1년 반 동안 신생 의류 쇼핑몰 회사 '어바웃더핏'을 큼직하게 키워냈다. 미팅 시간을 철저히 지키고, 심지어는 상품의 포장까지 일일이 코칭하는 꼼꼼함과 노련미가 엿보인다. 그런 그도 딸 하나를 둔 엄마다. 집에서 잠이라도 드나 했건만, 그새 노트북을 꺼내 작업에 몰두한다. 이쯤 되면 슈퍼맨...아니 슈퍼우먼이다. "하루 수면 시간이 7시간 미만일 경우, 7시간 이상 잘 때부터 비만이 발생할 확률이 38% 높아진다."는 모친의 충언(?) 따윈 가볍게 한 귀로 흘려보낸다.


주변의 많은 이들이 전문경영인(CEO)을 위촉하고 "당신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라" 충고하지만, 어찌 그리할 수 있겠나. 얼마나 많은 고생을 기울였고, 애정이 깃든 회사인데! 줄스는 회사만큼이나 가정에서의 무게감을 잃지 않으려 발버둥친다. 각자 역할을 분담하며, 당신은 파티에 내놓을 음식 18인분을 준비하라는 다른 학부모의 말에 줄스는 순순히 '오케이' 한다. 그 필사적인 사수 의지는 '일'과 '가정' 모두를 지키다 한쪽에서 끝내 밀려나지 않을까 하는 상시화된 불안으로 이어진다. '전업주부'인 남편이 외도를 하는 걸 알아차렸지만 대놓고 역정을 내지 않는다. 만일 불같이 화라도 냈다간 이혼해서 '나홀로 외톨이'가 된다면? '고독사'라는 최악의 시나리오까지 예감하며 울먹이는 줄스 앞에, 칠순 인턴 벤 휘태커(로버트 드니로)가 "그럼 나와 몰리 묘지 사이에 묻히면 되지요." 하고 위로한다. 그래도 그렇지. 한평생의 동반자인 남편과 자녀가 사라졌을 때의 상실감을 모두 회복하고도 남을까.


여성 노동자에게 가정은 또 다른 굴레다.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는 충분히 해소되지 못한 채 가정에서 심화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 같은 경우 육아휴직과 양육지원책의 수준은 아직도 미미한 실정이다. 유럽 각국은 양육은 남녀 모두의 책임을 전제로 깔고 정책 패키지를 내놓는다. 가령 프랑스는 오로지 자녀 수를 기준으로 110~400유로의 '가족수당'을 매달 지급한다. 독일의 '아동수당'은 부모가 직업훈련을 받고 있는 신분이라면 자녀가 27세가 되기 전까지(원래는 21세까지다) 계속 지급한다. 10년 전 지상파 드라마 <불량주부>가 화제를 낳으며 인기리에 방영됐다. 강산이 한 번 변했는데, 여전히 '남성 전업주부'의 상은 쉽사리 머릿속에서 떠오르지 않는다.


주위의 따가운 시선과 아무렇잖게 진열하는 말의 성찬도 유감이다. 줄스 오스틴의 꼼꼼한 성격을 두고 동료들 또는 CEO들은 "깐깐한 여자" "그래도 여자라서 완전히 믿고 맡기긴 어렵다" 등의 반응을 보인다. 남성 CEO들의 꼼꼼함은 '세심한 경영' '책임경영'으로 포장되고, 여성 CEO들의 그것은 '마귀할멈스러운 면모' '암탉이 울면 망한다'로 폄하돼야 하나. 여성은 직장에서 화장하고 있는 모습이 아름답고, 야근에 시달려 피부가 허옇게 뜨고 기미가 드러난 맨얼굴은 "어떻게 '여자'가 돼가지고 자기관리도 못하냐"는 비아냥을 들어야 하는 존재인가.


여성이 경영하는 국내 벤처기업이 2007년 501곳이던 것이 올해 6월 2481곳으로 집계됐다. 8년 사이 무려 5배나 급증했다. 생활용품 같은 실생활과 맞닿은 시장에 적합한 아이디어를 지니고서 창업했거나, 정보통신기술(ICT)을 기반으로 한 첨단제품을 파는 곳도 있다. 김호선 스파이카 대표가 내놓은 대용량 파일 공유 서비스 '선샤인'은 미국 실리콘밸리에서도 주목받고 있다. 올해 초 한-미 양국 벤처캐피털로부터 21억 원 규모의 투자를 받았다. 민윤정 코노랩스 대표는 1995년 다음에 입사해 '다음 카페'와 '티스토리' 등 커뮤니케이션 플랫폼을 개발한 주역이다. 남성이나 여성이나 하등 다를 바 없다. 다른 게 있다면, 염색체의 다름일 뿐이다. 이 땅의 남성들에게 부탁한다. "여성들이 온전히 일할 자유를 허(許)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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