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국회 인턴의 돌직구, '욜로족'에 왜 꼰대질이람?

[벼랑끝 청년빈곤 ④] '월130만원' 수진씨가 저축 포기한 까닭은


"저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 많으니까 다른 사람들과도 이야기 나눠 보세요." 한 청년이 인터뷰 내내 되풀이한 말이다. 새로운 사회의 출발선에 발을 내디딘 지금, 우리 청년세대의 절망은 짙고 깊은 골짜기에 있다. '88만원 세대'는 어느새 '77만원 세대'로 전락했다. 중산층 붕괴의 소용돌이에서 부모의 가난이 자식에게로 전이된다. 


가중되는 취업난의 복판에서 청년들은 저임금 비정규직으로 밀려나고, 그나마도 '하루살이 인생'인 단순노무직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청년들이 숨 쉴 틈이 있어야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고, 건강한 사회로 가는 길을 개척할 수 있다. 동시대를 사는 청년들의 목소리를 듣고 쓰기로 했다. 문제 해결을 모색하려면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 기자 말


▲정수진(가명)씨는 지난해 여름 일본으로 휴가를 떠났다. 저비용항공사(LCC)에서 내놓은 특가 항공권을 요긴하게 썼다. 새해 들어선 나홀로 제주도를 여행했다. 한라산 등반에 성공했다. 하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을 만끽하는 순간이 행복하단다. 단 한 번 주어지는 인생이므로. ⓒ pixabay



유력 정당의 국회의원 사무실에서 인턴으로 일하는 정수진(가명·26·서울시 등촌동)씨는 지난해 여름 일본으로 휴가를 떠났다. 저비용항공사(LCC)에서 내놓은 특가 항공권을 요긴하게 썼다. 새해 들어선 나홀로 제주도를 여행했다. 한라산 등반에 성공했다. 하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을 만끽하는 순간이 행복하단다. 단 한 번 주어지는 인생이므로.


그러나 수진씨의 삶을 깊숙이 알지 못하는 이들은 표면만 본다. 막연하게 '재산 많고 돈 많은 사람' 취급한다. 그의 일자리는 주5일 근무에 야근까지 붙는다. 월급은 세후 130만 원 수준이다. 아르바이트와 계약직을 전전하던 시절 벌던 것보다 10~20만 원 더 많이 받는 데 그쳤다.


그는 자신을 정의 내린다. '욜로(YOLO·'You only live once'의 줄임말로, '인생은 한 번뿐이니 현재 행복을 추구하며 살자'는 의미)'에 충실한 삶을 살고 있다고. 취업 포털 잡코리아가 운영하는 아르바이트 포털 '알바몬'에 따르면, 최근 2030세대 73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 44.4%가 '나는 욜로족'이라 밝혔다.


상당수 어른들은 '돌체 비타(Dolce Vita·달콤한 인생)'나 '케세라세라(Que Sera Sera·될 대로 되라)' 따위의 용어로 욜로를 규정짓는다. 화려하고, 사치스럽고, 향락에 빠진 삶. 수진씨는 젊은이들을 흘겨보는 기성세대에 일침을 날리고 싶었다. 인터뷰를 자청한 이유도 남달랐다.


"제 욜로 라이프는 가난에서 기인했어요."


그는 늘 의문을 품었다. 어른들은 왜 현실이 어려우면 오늘도, 내일도 열심히 일하라는 충고를 건네는지. 행색이 남루한 청춘에겐 여가생활과 자기계발을 할 권리는 없는 건가.


"엄마는 돈 아껴서 해외여행이라도 가봤어?"


어머니는 자식이 여행 가는 게 탐탁지 않았다. 틈나면 "돈도 없는데 왜 자꾸 여행을 가냐"면서 "조금이라도 돈 모으라"고 당부했다. 그럴 때면 "돈 없다고 돈 없이 지내면 더 가난해진다"며 "나는 거지가 되더라도 거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받아쳤다. 언젠가 수진씨는 잔소리에 지쳐 홧김에 독설을 내뿜었다.


"엄마, 그렇게 돈 아껴서 지금까지 한 번이라도 해외여행 가봤어?"


어머니의 가슴을 후벼 파는 말이었다. 부모님은 푼돈을 모아서 한 푼 쓰기를 두려워했다. 늘 가난에 쩔쩔맸다. 그게 현실이었다. 1990년대 수진씨 아버지는 식당에 물티슈를 납품하는 사업을 벌였다. 그땐 벌이가 제법 쏠쏠했다.


호의호식으로 지내는 것도 한순간이었다. 1997년 외환위기는 가족의 생계에 직격탄을 날렸다. 경기도 안산 상록수역 인근에 자리 잡은 50평짜리 아파트를 팔았다. 이후 도시 변두리로 떠났다. 이사 간 집은 허름한 빌라였다. 옛집과 견줘보면, 크기가 확 '쪼그라든' 집이었다.


가까이에 저수지가 있었다. 흘러나온 물은 실개천과 만났다. 여섯 살 수진씨는 "집 근처에서 물고기를 잡을 수 있다"며 기뻐 폴짝 뛰었다. 그때 어머니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가장으로서 권위를 회복하고 싶었던 아버지는 물러서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돈을 긁어모았다. 2000년대 지인들과 철강업에 투신했다. 하지만 사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인명 사고가 일어났다. 장년 노동자가 용광로를 살피다 그만 발을 헛디뎠다. 쇳물에 빠져 죽은 것이다. 공장은 개업 1년도 안 돼 문을 닫았다.


잇따른 사업 실패로 잔고가 바닥났다. 온 가족이 생업 전선으로 내몰렸다. 수진씨는 열세 살 무렵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제 용돈을 마련할 요량이었다. 해본 아르바이트 종류는 전단지를 배포하는 일부터 고깃집에서 음식을 나르는 일까지 다양했다.


모녀가 같은 매장에서 일한 적도 있다. 2009년 수능시험을 치른 직후 수진씨가 대형마트 화장품 코너에서 근무했을 때다. 어머니는 가끔 마트 판매원으로 일했다. 중고령 여성이 고를 수 있는 일터는 적었다. 지난해엔 평일 오후 2시부터 다섯 시간 동안 커튼 코너에 서서 손님들에게 제품을 설명했다. 최저시급을 받았다. 수중에 반찬거리 살 정도의 돈만 쥐었다.


아버지가 사업에 도전하고 실패하고, 재기하는 과정을 되풀이하는 동안 겪은 고초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단다. 2년 전 아내 몰래 사업하겠다고 귀띔했다. 국책은행을 다니는 수진씨 오빠가 통장에 쟁여둔 자금 6천만 원을 아버지가 빼냈다. 그랬다가 '홀라당' 날려 버렸다.


그 뒤로도 아버지는 다단계 사업을 기웃거렸다. 뒤늦게 마음잡고 올 초 막노동을 나갔다. 공사 중인 건물 4층에서 추락했다. 천운으로 살았다. 비계(飛階)에 걸려 땅바닥에 바로 떨어지지 않았다. 갈비뼈 몇 대 부러진 게 끝이다. 당시 수진씨는 사무실에서 일하다가 "아버지가 쓰러졌다"는 연락을 받았다.


"깜짝 놀라서 '어떡하지' 이러면서 아빠한테 전화를 했어요. 병원에 누워 있다고 하는데, '병원비 많이 나오면 어떡하나' 이 생각이 스치는 거예요. 내 자신이 되게 싫어지더라고요."


대학생 때 일주일 3개 알바... 대상포진 앓고, 성추행 겪기도


▲청년빈곤에 따른 고통을 겪는 정수진씨 ⓒ 박동우



2010년 서울 소재 4년제 대학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했다. 가족 형편이 어려우니 의존할 도리가 없었다. 등록금을 제외한 모든 비용은 온전히 제 몫이었다. 줄곧 아르바이트를 했다. 일주일에 두 개 이상의 아르바이트를 하는 건 기본이었다. 


주중에는 카페 점원으로 일하고, 주말에는 스크린골프장으로 향하는 식이었다. 한 달 60~70만 원을 벌어 생활비로 충당했다. 그러다 학교 시험 기간이 겹치면 수진씨의 면역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급기야 대상포진에 걸렸다. 온몸이 쑤시고 따가움이 퍼졌다. 바늘로 콕콕 찌르는 느낌이 들었다.


뇌리 저편에서 길어 올린 숱한 아르바이트의 경험들 가운데선 성추행을 겪은 기억도 있었다. 대학교 2학년 때 시내 번화가 당구장에서 한 달가량 일했다. 손님들에게 음료수를 서빙하고, 컵을 설거지했다. 카운터에서 이용료 계산도 맡았다.


출근한 지 며칠 되지 않아, 40대 중반 나이쯤 되는 '실장'이 자길 불렀단다. 실장은 "웃옷 단추를 제대로 잠그지 않았다"고 지적하며 수진씨 가슴에 손을 갖다 댔다. 눈 깜짝할 새 벌어진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까맣게 잊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수업을 마치면 아르바이트를 하러 교문을 나서는 자신과 달리, 밖으로 놀러 다니거나 그대로 집으로 향하는 친구의 모습이 늘 부러웠단다. 미술고를 졸업해 연극영화과에 입학했다가 적응하지 못하고 소속을 옮긴 동기였다. 수진씨는 "학교를 졸업할 때쯤 그 친구는 가족이 운영하는 고급주택 건축회사에 들어갔더라"며 "나도 그 친구만큼 형편이 풍족했더라면 내가 다니고 싶은 학원도 다니고 편한 여건에서 공부했을 것"이라고 울컥했다.


공익요원도 받는 식권, 계약직은 못 받았다


수진씨는 사회복지사를 꿈꿨다. 졸업을 앞둔 2014년 종교재단이 운영하는 장애인복지관에서 일할 기회를 얻었다. 근무기간이 2년인 계약직이었다. 나라에서 기관에 보조금을 쥐여주는 대신 청년 인력의 채용을 권장했다. 그렇게 뽑힌 젊은이들은 어디까지나 금방 쓰고 버려질 일회용품이었다.


수진씨는 기업에 장애인 구직자의 채용을 알선하는 부서에 배속됐다. 각 기업 관계자를 수시로 만나 뽑힌 직원의 업무 적응 실태를 면밀히 듣는 한편 장애인 취업자들의 고충 상담을 진행했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근무했다. 한 달 봉급은 126만 원에 그쳤다. 상여금은 없었다. 사회복무요원(공익근무요원)도 받는 2천500원짜리 구내식당 식권조차 못 얻었다. 점심시간 때면 같은 계약직 동료와 건물 밖으로 나갔다. 근처 편의점이나 식당에서 끼니를 때웠다.


무엇보다 팀원들 사이 '보이지 않는 벽'을 실감했다. 정규직들은 그들만의 세계 안에서 따로 노는 듯했다. 여느 부서면 있어야 할 단체 카카오톡 채팅방의 존재가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들은 비정규직에게 말을 붙이지 않았다. 무기력했다. 외로웠다. 마음에 우울한 공기가 스며들었다.


▲유력 정당의 국회의원 사무실에서 인턴으로 일하는 정수진씨의 책상. 자판 앞에 명함이 수북하게 쌓여 있다. 국회사무처에서 주는 월급은 이전 직장과 다를 바 없었다. 그래도 사회복지 분야와 관련된 입법에 참여할 수 있겠단 생각에 가슴이 설렜다. 하지만 그 기대는 산산조각 났다. 잡무는 고스란히 여성 직원의 몫이었다. ⓒ 정수진



곡절을 겪다 지난해 여의도에 새 둥지를 틀었다. 20대 국회 개원과 동시에 국회 의원실 인턴으로 취직했다. 국회사무처에서 주는 월급은 이전과 다를 바 없었다. 그래도 사회복지 분야와 관련된 입법에 참여할 수 있겠단 생각에 가슴이 설렜다. 하지만 그 기대는 산산조각 났다. 잡무는 고스란히 여성 직원의 몫이었다. 조간신문을 가지런히 탁자에 올려놓고, 의원 집무실 책상을 정리정돈했다. 화분에 물을 줬다. 법률안 발의 협조요청서를 각 의원실에 돌리는 일은 고역이었다.


"의원회관 10층부터 3층까지 'ㄷ'자 형태의 건물 복도를 쭉 돌아다니면 발에 물집이 잡혀요. 슬리퍼를 신고 다니더라도 발이 아프긴 매한가지예요. 그러다보면 '내가 전단지 배포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개원 직후 첫 달은 의원회관 휴게실에서 잠을 청할 만큼 야근이 잦았다. 그러나 자기 성과를 낼 여유가 없었다. 상사들의 일을 돕는데 공력을 들였다. 정책 분야로 역량을 쌓고 싶었으나 기회는 열리지 않았다.


얼마 전 보좌관과 면담할 때 수진씨가 하소연을 늘어놨단다. 정책, 정무, 홍보 등 어느 분야에 특화되지 못한 채 사무실에서 자기만 애매한 위치에 놓여 있다고. 그러자 보좌관은 "비서관을 네 '사수'로 붙여 줄테니 열심히 가르침 받으라"고 약속했다.


하지만 올 초 국회사무처가 국회 인턴의 재직 기간을 2년 이내로 제한했다. 2년을 넘겨 일하는 국회 인턴들은 여의도를 떠나야 한다. 수진씨는 "여긴 누군가가 죽어 나가야 윗자리로 올라갈 수 있는 구조"라며 "사람을 휴짓조각으로 만드는 편법"이라 비판했다. 과연 자신이 9급·7급 비서 자리를 꿰찰 수 있을 것인지 스스로도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승진의 문턱은 높다. 그가 국회에 들어온 지 어느덧 1년이 넘었다.


"저축해도 아파트 못 사... 차라리 하고 싶은 데 돈 쓸래요"


▲매월 130만 원 급여에서 월세 40만 원, 금융권에서 빌린 학자금을 갚는데 30만 원씩 나간다. 남는 돈은 60만원. 이 돈으로 식사, 교통비, 통신비, 옷 구입, 지인들과 모임 비용 등에 쓰고 나면 저축할 돈이 없다. ⓒ pixabay



지난 6월 <한국일보>에선 300여 명 이상의 전국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월평균 지출액을 조사했다. 117만 원에 달했다. 기사 아래엔 '과소비'라는 댓글 일색이었다. 수진씨 친구 중에도 "과장됐다"이라며 혀를 차는 이가 있었다고 한다. 수진씨가 반문했다.


"친구는 차비, 밥값 정도만 생각해서 한 달 30만 원이면 살 수 있다고 생각하더라고요. 그런데 걔 말대로 하려면 친구도 만나지 않고, 문화생활을 포기해야 해요. 그저 숨 쉬고 먹고 자며 하루를 버티는 삶만 살아가야 하죠."


매월 130만 원 급여에서 월세 40만 원, 금융권에서 빌린 학자금을 갚는데 30만 원씩 나간다. 남는 돈은 60만 원. 이 돈으로 식사, 교통비, 통신비, 옷 구입, 지인들과 모임 비용 등에 쓰고 나면 저축할 돈이 없다.


"거의 돈을 쓰지 않은 채 살면 한 달에 30만 원씩 저금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생각해봐요. 1년을 모아야 360만 원이에요. 그렇게 해서 10년을 모아요. 목돈은 3천600만 원에 불과해요. 이걸로 무엇을 하나요? 아파트를 살 수 있나요?"


돈을 모으기 여의치 않은 상황이기 때문에, 굳이 저축하느라 제 살을 깎지 않겠다는 게 수진씨 생각이다. 결혼을 둘러싼 욕심이 없는 것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그는 "결혼을 하면 집을 구입해야 하고, 자녀한테 들어갈 지출까지 염두에 둬야 한다"며 "내 앞가림 겨우 하는데 결혼을 굳이 해야 할지 의문이 든다"고 말했다.


차라리 그 돈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 나의 만족과 맞닿은 대상에 투자하자는 게다. 올여름 드론에 취미를 붙여 다장창신(DJI)에서 출시한 제품을 샀다. 독서를 좋아해 매달 다섯 권 이상의 책을 사고, 신간 서적을 소개하는 인터넷 방송 패널로 고정 출연한다.


생명을 향한 애착도 깊어 집에서 반려동물을 키운다. 햄스터, 앵무새, 토끼를 벗 삼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틈틈이 뒷이야기를 올린다. 수진씨는 사회적 활동에도 열심이다. 청소년 선거연령 하향 요구가 빗발치던 지난겨울엔 국회 앞에서 농성하던 고교생들을 찾아가 함께 팻말을 들었다. 독거노인들을 대상으로 쌀을 배달하는 자원봉사에도 나선 적 있다.


기실 많은 기업과 미디어는 욜로 열풍을 상업주의에 가뒀다. "오늘을 활활 불태우라"며 호텔·리조트 이용을 권유하는가 하면, "제 삶의 가치는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라며 은근슬쩍 최신형 노트북의 장점을 알린다.


유수 언론은 비판에 가세한다. 욕망에 눈멀어 분수 모르고 소비하는 청년들. 불확실한 미래를 대비조차 않는 무책임한 청년들. 자본은 사각의 링에 청춘의 등을 떠밀고, 언론은 기다렸다는 듯 턱에 주먹을 뻗는다.


수진씨는 이런 세상에 '묵직한 패스트볼'을 던졌다.


"사실 욜로족이라 하면 인생을 낭비하는 사람들이라 생각하지만, 인생을 즐기려는 사람들이야말로 자기 삶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한 사람들이 아닐까요? 저는 지금도 고생하는 사람들한테 앞으로도 계속 이 악물고 사서 고생하라고 '꼰대질'하는 어른들이 싫어요."


['벼랑끝 청년빈곤' 이전 기사 보기]

①'가난의 늪' 빠진 청년... "청포도 사탕으로 끼니 때워"

②'조현병'과 '중졸'의 굴레… "계속 살자니 토할 것 같아요"

③연 2천 시간 일하고 병까지, 스물넷 정규직의 '대가'


박동우 기자 pdwpd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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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구청이 부순 '아현포차', 시민들이 다시 일으킨다

'노점 강제철거 1주기' 앞두고 시민과 함께 <아현포차 요리책> 내는 할머니들


보도블럭을 들어낸 자리에선 흙이 숨쉬었다. 땅에서 쫓겨난 사람들은 폐선 부지 한가운데 상추·방아 같은 잎채소들을 심었다. 예닐곱 평은 족히 넘어 보였다. 그들은 '아현텃밭'이란 나무 팻말을 박았다.


24일 오후, 서울 마포구 지하철 공덕역 근처 경의선 공유지(폐선 부지) 채소밭에서 조용분(73, 서울 아현동)씨가 허리를 숙여 깻잎을 따고 있었다. 오른손에 깻잎 몇 장을 쥐곤 자신이 운영하는 주점 '거인포차'로 향했다.


두 시간여 지났을까. 조씨가 영계백숙과 닭죽을 내왔다. 아이스크림을 팔던 상인을 비롯해 몇몇에게 식사를 거저 대접했다. 내친 김에 기자도 닭죽에 숟가락을 갖다 댔다.


한술 떴다. 묽은, 누런 빛깔 육수 사이로 푹 퍼진 찹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곱게 썬 당근, 양파, 감자 조각이 눈에 들어왔다. 고기는 질깃하면서도 담백했다.


이내 조씨가 자그만 접시에 초장을 곁들인 쓴나물(씀바귀) 무침을 올렸다. "이게 술 마시는 사람들 간에 좋은 거야." 한 젓가락 집어 먹었다. 상큼한 향과 쌉싸래한 맛이 입 안에서 어우러졌다.


▲24일 오후 서울 마포구 지하철 공덕역 근처 경의선 공유지에서 주점 '거인포차'를 운영하는 조용분(73·서울 아현동)씨가 요리한 영계백숙, 닭죽, 초장을 곁들인 쓴나물(씀바귀) 무침. ⓒ 박동우



지금 경의선 공유지엔 아현동 포차거리에서 장사했던 두 할머니가 차린 임시 포장마차가 있다. '작은 거인' 이름을 내세웠던 조씨의 네댓 평짜리 포차, 그리고 '강타 이모집'을 차렸던 전영순(69·서울 용강동)씨의 여덟 평 가게 '코끼리 레스토랑'이다. 이들은 지난해 30년간 생계를 받치던 터전을 잃었다. 재개발로 들어선 대단위 아파트 단지 주민들의 민원 때문이었다.


최근 이들 가게 주방에 사진작가가 다녀갔다. 자신있게 내놓은 메뉴인 오돌뼈, 조기매운탕, 순두부찌개 등의 사진을 찍었다. 할머니들은 채록하는 이들에게 음식 요리법을 술술 풀었다.


아현동에서 밀려난 상인들을 돕는 시민단체 '아현포차 지킴이'의 기획이다. 회원들은 할머니들의 요리 비결을 차곡차곡 눌러 담은 <아현포차 요리책>을 출간하기로 했다. 책 간행 아이디어를 낸 황경하 자립음악생산조합 운영위원은 "단순히 요리책으로 그치지 않는다"며 "두 이모(할머니)의 인생 서사와 함께 단골손님 등 아현동 포차와 얽혀 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실었다"고 밝혔다.


'달동네' 단골들과 함께 만든 아현 포차


▲24일 오후 서울 마포구 종합체육시설 아현스포렉스에서 지하철 2호선 아현역으로 이어지는 도로(굴레방로). 지난해 8월 포장마차 18곳이 자리잡은 속칭 '아현동 포차거리'를 강제철거한 마포구청은 해당 자리에 70여 개의 대형 화분을 놓았다. ⓒ 박동우



"옛날엔 아현동이 달동네라 눈이 오면 마을버스가 도로를 올라가질 못했어요. 포차 거리 있던 데가 버스 정류장이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거기서들 한 잔씩 마시고 올라가는 편이에요. 지금 40대 후반, 50대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우리하고 같이 늙는 거죠. 아현동을 만들어낸 사람들이 우리 포장마차 주인들이에요."(전씨)


아현동은 서울에서도 서민들이 모여 살던 동네로 손꼽혔다. 1930년대 초 굴레방 다리를 중심으로 시장이 생겨났다. 6․25전쟁을 거친 뒤엔 피란민들이 아현고가도로 밑 간선도로에 늘어서 노점상을 열었다.(1971년 12월 6일자 <경향신문>) 아현초등학교 정문에서 불과 20m 떨어진 담 아래엔 쓰레기 적치장이 1992년까지 있었다.


전씨, 조씨를 비롯한 포차 할머니들은 1986년 무렵 오늘날의 굴레방로 일대에 리어카를 갖다놓고 장사를 벌였다. 겨울방학 때 반짝 군고구마 장수로 변신한 고교생들이 버리고 간 리어카를 구했다. 한때 여기엔 큰 규모의 '서강학원'이 자리잡고 있었다. 대학 입시생들을 고객 삼았다. 이들은 떡볶이 노점, 풀빵 장사, 과일 팔이까지 안해본 게 없었다.


할머니들이 포장마차 영업을 결심한 건 1991년 11월의 일이다. 전씨가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노점 규모가 점점 커지니까 장사가 두 줄이 되더라고요. 앞줄엔 야채 장사들이 자리를 잡았고, 우리는 뒷줄이었어요. 누가 뒷줄에 와서 떡볶이를 먹겠어요? 손님들이 뒷줄 가게를 둘러보지도 않고 지나쳤어요. 곰곰이 생각했죠. 그나마 돈을 벌 수 있는 건 포차 밖에 없었어요."


할머니들은 매일 낮과 밤이 바뀐 삶을 이어갔다. 보통 저녁 6시쯤 문을 열었다. 밤을 지나 새벽 4~6시까지 가게 불을 밝혔다. 각양각색의 손님들을 맞았다. <별들의 고향>으로 데뷔한 영화감독 이장호, <칠갑산>을 부른 가수 주병선 등 유명인사들이 90년대 종종 들렀단다.


인쇄소를 운영하는 어느 손님은 조씨에게 '작은 거인 욕쟁이 이모 할매' 글귀를 박은 명함을 선물했다. 할머니는 중매를 서서 두 단골손님의 인연을 결혼으로 성사시킨 기억이 선하다. 포차를 찾아온 비행청소년들에게 공짜로 음식을 먹이고 돌려보낸 경험도 떠오른다. 조씨가 옛 시절을 회상했다.


"서대문에서 미성년자 다섯 명이 왔어. '너희들은 학교 졸업도 안했는데, 이 다음에 커서 완고한 직장을 잡았을 때 이모한테 와서 돈 갚아라'고 말했지."


전씨는 자기 포차를 찾던 20년지기 단골과 막역한 사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포차에 발자국을 남긴 사내였다. 할머니는 청년의 결혼식을 찾아가 축하했다. 청년이 자식을 낳자 "우리 집 손님들 중에서 처음으로 출산 소식을 알려줬다"며 아기 옷을 한 벌 사줬다. 청년은 어엿한 가장이 된 뒤에도 명절 때면 늘 포차를 찾아와 과일상자 선물이나 용돈을 전해주고 갔단다.


'틀니, 단골들 연락처' 챙길 새도 없이 부서진 가게


▲현재 서울 마포구 지하철 공덕역 근처 경의선 공유지에서 주점 '거인포차'를 운영하는 조용분(73·서울 아현동)씨. 그는 지난 30년간 아현동 포차거리에서 '작은 거인' 이름을 내세운 포장마차를 가꿨다. ⓒ 박동우



포차가 문을 닫기 두 달 전이었다. 조씨가 운영하던 '작은 거인' 포차를 찾은 웬 손님이 술을 잔뜩 마시곤 진상을 부렸단다. 당시 포차에 있던 지킴이 황경하씨가 기억을 더듬어가며 말했다.


"나이를 스물셋 정도 먹은 애가 하는 행동이 도가 지나친 것 같아서 밖으로 끌고 나왔어요. 이야기를 나누는데 펑펑 울더라구요. 걔네 엄마 아빠가 부동산 중개업을 했어요. '왜 우냐'고 물으니까 '철거 집행당하기 직전'이라면서 '못 이긴다'고 말했어요. 여기(아현동 포차거리)가 없어질 거란 걸 너무나 잘 안 거에요."


이명박 전 대통령은 서울시장 재임 시절 도시 전역에 재개발의 씨앗을 뿌렸다. 2005년 서울시가 아현동 일대를 '아현3 주택재개발정비구역(아현뉴타운)'으로 지정한 게다. 우여곡절 끝에 3800가구 규모의 래미안푸르지오아파트가 완공됐다. 2014년 9월부터 본격 입주가 시작됐다.


하지만 아파트 주민들은 포장마차를 곱게 보지 않았다. ▲ 학생 안전 위협 ▲ 학생 및 차량 통행 불편 ▲ 교육환경 저해 ▲ 미관상 문제 발생 등을 거론하며 마포구를 상대로 민원을 제기했다. 할머니들은 행여나 주민들에게 책잡힐까 걱정했다.


전씨가 책임지고 가게 앞에 놨던 평상과 가스통을 치웠다. 점포당 100만 원의 비용을 들여 주변 환경을 정비했다. 하지만 그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2016년 1월 주민들은 집회를 열어 포차거리를 치워 달라 외치는 목소리를 높였다.


마포구청이 철거의 불꽃을 피울 즈음 기름을 부은 이는 지역구 국회의원이었다. 더불어민주당 노웅래 의원은 20대 총선을 앞두고 낸 공약집에서 '명품 주거 인프라 구축'을 약속했다. 그 약속의 일환이 "아현초 일대 포장마차 정비를 마무리"하겠다는 거였다.


당시 노웅래 의원은 3선에 도전했다. 전씨는 아현시장 입구에서 유세를 펼치던 노 의원에게 질문을 던졌다. "만약 국회의원에 당선되면 저 포장마차는 어떻게 할 거냐"고. 전씨의 말이다.


"그렇게 물어보니까 '당연히 철거해야죠'라고 단호하게 말했던 사람이에요. 내가 포장마차 주인인 줄 몰랐던 거에요. 그 사람은 표밭을 일구기 위해 그렇게 공약을 건 사람이라고 봐요."


사실 행정당국에서 '불법' 운운한 건 자가당착이나 다름없다는 게 할머니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쓰레기 적치장을 없앤 구청은 1993년 두 줄로 들어선 노점상을 한 줄로 정비했다. 이때부터 포차 할머니들은 매년 도로사용료를 구청에 냈다. 


나중에 '도로점용변상금'으로 용어만 바뀌었을 뿐 사실상 임대료와 유사한 명목이었다는 게다. 특히 전씨는 "2006년부터 본격적인 재개발에 들어갔는데, 8년이란 기간 동안 구청은 어떠한 대안도 제시하지 않았다"며 "우리가 정말 '불법'을 저질렀다면, 그간 이를 용인한 구청은 공범이 되는 셈"이라 지적했다.


구청은 2016년 1월과 6월 두 차례에 걸쳐 자진퇴거 명령을 내렸다. 그해 7월 1일 구청은 행정대집행을 시도했다. 포차 10곳의 문짝을 뗐다. 소동 끝에 18곳 포차 가운데 8곳이 영업을 중단하고 스스로 나갔다. 전씨와 조씨, 두 할머니는 2016년 8월18일 강제철거 당일까지 버틴 이들에 속한다.


전씨의 설명에 따르면, 구청은 포크레인 2대와 100명 이상의 철거인력 등을 동원해 행정대집행에 나섰다. 모두가 각자의 가게에 똬리를 틀고 가만히 바깥을 응시했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주인장 가운데 최고령자이던 87세 할머니는 들것에 실려 나왔다.


▲서울 마포구 지하철 공덕역 근처 경의선 공유지에 자리잡은 포장마차 '코끼리 레스토랑'의 벽에 나붙은 사진들. 2016년 아현동 포차거리 철거 반대 투쟁 당시 상황이 고스란히 녹아 들었다. 특히 오른쪽 맨 아래 사진의 경우, 지난해 8월 아현동 포차거리를 둘러싼 행정대집행(강제철거)을 단행한 장면이다. 연두색 조끼를 입은 이들은 마포구청 관계자들이고, 주황색 조끼를 입은 청년들은 용역업체 직원들이다. ⓒ 박동우



포차 안에서 꼼짝 않던 전씨는 용역들에게 끌려 나올 때 왼손 가운뎃손가락을 다쳤다. 부상 입었던 손가락은 여전히 두툼했다.


"지금도 손가락이 움직여지지 않아요. 아침에 일어나면 통증이 심해져요."


예고 없는 철거는 가게 안에 놔둔 귀중품을 챙길 여유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전씨는 자식들이 맞춰준 틀니를 비롯해 단골손님들의 연락처가 망라된 노트 등을 몽땅 잃었다. 조씨는 비상금을 모아놓던 저금통까지 날렸다. 포크레인은 묵묵히 가게를 부쉈다.


"이승만 박사 때도 인정이 있었는데 지금은..."


▲현재 서울 마포구 지하철 공덕역 근처 경의선 공유지에서 여덟 평짜리 포장마차 '코끼리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전영순(69·서울 용강동)씨. 그는 아현동 포차거리에서 '강타 이모집'을 차렸다. 전씨는 아현포차 투쟁을 이끄는 리더격 인물이다. ⓒ 박동우



두 할머니가 자릴 옮긴 경의선 공유지의 운명도 순탄치 못하다. 지난 2011년 이랜드가 개발 주관사업자로 선정됐다. 회사는 철도시설공단과 계약을 맺고 30년 동안 땅을 빌렸다. 공사에 돌입하면 여기서 장사하는 이들은 오갈 데가 사라진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마포구청은 할머니들을 가만 놔두지 않았다. 식품위생법 위반 혐의를 적용해 고발한 게다. 공원에서 장사한다는 게 잘못됐다는 이유였다. 당국은 전씨에게 50만 원, 조씨에겐 70만 원의 벌금을 내렸다. 이를 두고 전씨는 "수돗물, 전기, 냉장고도 없이 떡볶이 장사하는 노점상은 가만 놔두는 마당에, 냉장고도 설치하고 수돗물 콸콸 나오는 곳에서 음식을 조리해 파는 게 어떻게 식품위생법 위반이 되느냐"며 "그저 약한 자는 짓밟아도 된다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고 분통을 터트렸다.


강제철거 뒤 조씨는 기초생활수급자 신세로 전락했다. 그런데 자식들의 경제적 형편이 여의치 않아, 사실상의 가장 노릇을 하고 있다. 쉰 넘은 아들딸이 지병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5월 마포구청은 아현시장을 중심으로 한 지구단위계획구역에 일부 지역을 편입시켰다. 그가 홀로 사는 아현동 언덕배기 집도 재개발 대상에 올랐다. 오는 12월까지 방을 빼야 한다. 사실 월세가 밀린 지 일 년 가까이 돼서 언제 쫓겨나도 이상하지 않다.


두 할머니가 바라는 건 그저 한 가지다. 강제철거를 둘러싼 책임이 있는 박홍섭 마포구청장과 노웅래 의원이 '공식적인 사과'를 하는 것이다. '해방둥이' 조씨가 갑자기 어릴 적 일화를 꺼냈다.


"우리 엄마는 상인이니까 다른 마을에 물건 팔러 가는데, 모르는 집에서 하룻밤 묵어도 대접을 받았어. 우리 집엔 언니랑 나, 둘만 남아. 어느 날 하늘이 깜깜해지니까 약 장사하는 할머니가 오더라고. 가난 속에서도 우리 언니는 된장찌개를 정성스럽게 끓여서 보리밥과 함께 식사 대접을 했어. 이승만 박사 때까지 그런 인정 같은 게 있었는데, 지금은 도통 이해가 안 돼."


전씨는 자신들이 처한 현실을 '삶의 전쟁'으로 규정지었다.


"이것은 도저히 물러 설 수 없는 싸움이잖아요. 나이 먹은 사람들이 할 수 있단 걸 보여주고 싶어요. 당신네들은 우리를 갖다가 속절없이 파괴했지만 우리는 아직 살아있다고."


투쟁이 길어질수록 인간의 층위가 촘촘해지게 마련이다. 떠나는 사람, 남겨진 사람, 돌아오는 사람. 오늘의 도시 개발 양상은 사람과 '더불어' 가는 것일까.


짙은 밤하늘을 지긋이 바라보던 조씨가 노랫가락을 뽑았다. 1972년 가수 문주란의 발표곡 <공항의 이별>이었다.


"하고 싶은 말들이 쌓였는데도 / 한 마디 말 못하고 헤어지는 당신이 / 이제 와서 붙잡아도 소용없는 일인데..."


※<아현포차 요리책>을 내기 위한 크라우드펀딩의 경우, 텀블벅 홈페이지에서 '프로젝트 밀어주기'를 클릭하면 되며 내달 5일 마감한다. 모금액은 책 제작과 아현포차 할머니들의 투쟁기금을 마련하는 데 쓰인다.


박동우 기자 pdwpd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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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근육질 여성 선수는 왜 '남자'로 의심받아야 하나

스포츠의 그늘 ‘성차별과 동성애 혐오’, 평창올림픽에 묻는다


▲2009년 베를린 세계육상선수권 대회 여자 800m 결승전에서 우승을 차지한 캐스터 세메냐 선수 ⓒ 연합뉴스



남아프리카공화국 여자 국가대표가 선두로 치고 나왔다. 그는 여유 있게 결승선에 안착했다. 웅성거리는 군중들의 목소리를 비집고 미국 <CBS> 방송 중계 아나운서가 외쳤다.


"그녀가 남자처럼 달리고 남자 목소리로 말한다면, 그녀는 남자인 걸까요?"


2009년 8월 19일 베를린 세계육상선수권 대회 여자 800m 결승전에서 우승을 차지한 캐스터 세메냐는 금메달을 딴 순간부터 '성 정체성' 논란에 시달렸다. 바닥에 깔릴 듯한 목소리, 얼굴에 난 거뭇한 털, 완벽하게 갈라진 어깨 근육은 의심의 표적이 됐다. 승리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남성호르몬 주사를 맞은 것 아니냐고. 국제육상경기연맹(IAAF)은 그에게 성 감별 검사를 요구했다.


검사 결과 그는 '인터섹슈얼(intersexual·양성자)'인 것으로 알려졌다. 남자와 여자의 성별 특성을 모두 지닌 사람. 밖으로 드러난 남성 생식기는 없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자궁과 난소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몸속에선 뭇 여성보다 3배 이상 많은 테스토스테론(남성호르몬)이 나왔다.


국제육상경기연맹(IAAF)은 자체 결론을 내지 않았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2015년 IAAF는 슬그머니 새 규정을 내놨다. 남성호르몬 수치를 잣대로 삼아 여성 종목 출전자를 가려내겠다는 것이었다. "근거가 부족하고 차별의 소지가 있다"며 스포츠중재재판소(CAS)가 제동을 걸어 이 규정은 효력을 잃었다.


'남자가 여자보다 강하다' 편견이 여성 스포츠인의 성취 막아


스포츠의 근본 목적은 '불가능 극복'과 '목표 달성'으로 요약된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고, 경쟁을 거쳐 승리를 얻는 데 있다. 스포츠계에서 주로 '강함' '빠름' '공격성' 등 소위 '남성적'이라 불리는 자질이 더 중시되는 이유다.


이와 다르게 여성에게는 '우아함' '아름다움'이란 이미지를 요구하거나, 작고 가녀린 체구를 지닌 여자 선수를 '정상'으로 간주한다. 밑바탕엔 "남성이 여성보다 신체적 여건상 우월하다"는 편향이 깔려 있다. 월등한 기량을 지닐 권리는 남성에게 주어져 있다는 게 그간의 젠더 규범이다.


"남자 운동선수는 '남자답게 행동하라'는 압박을 항상 받고 있습니다. 여성성을 보인다면 남자 운동선수의 능력에 의심을 받게 되죠. 또 여자 운동선수들은 너무 남자같이 굴지 못 하게 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습니다. 특히 트랜스젠더나 인터섹슈얼 선수들은 항상 의혹과 공포가 어린 시선을 받게 됩니다. 불공평하게 스포츠 경기에서 이득을 보고 있다는 비난도 종종 있지요."


지난 18일 스포츠 분야의 성소수자 인권활동가 케프 세넷이 의문을 제기했다. 이날 서울 중구 주한 캐나다 대사관에서 열린 '성적소수자 커뮤니티를 위한 프라이드하우스 만들기' 강연회 도중 나온 발언이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성차별과 호모포비아(homophobia·동성애 혐오)는 여성, 트랜스젠더, 인터섹슈얼 운동선수들의 성취에 제멋대로 한계를 설정하는 역할을 한다"고 지적했다. 전통적인 성별 규범이 운동선수들의 뛰어난 성과를 온전히 평가하지 못하게 막는 걸림돌로 작용한다는 취지다.


"농구선수였던 야오밍은 남성입니다. 누구와도 비교되지 못할 만큼 체격이 매우 큰데도, 아무도 그를 두고 남자인지 여자인지 의심하지 않았지요."


우리 스포츠계도 이런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2013년 여자 축구선수 박은선을 둘러싼 논란이 불거졌다. 그해 시즌 득점왕 박 선수는 키 180㎝, 몸무게 74㎏에 달했다. 건장한 몸에서 강한 경기력이 뿜어져 나왔다. 그런데 한국여자축구연맹 소속 6개 구단에서 박은선 선수를 겨냥해 성별 진단을 요구했다. 여성의 체격이 너무 특출하면 '여성이 아닌 사람'으로 간주돼 집단에서 배제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의 전형이다.


"게이를 죽이겠다"... 선수 생명 위협하는 '커밍아웃'


▲스포츠 분야의 성소수자 인권활동가 케프 세넷이 지난 18일 서울 중구의 주한 캐나다 대사관에서 '성적소수자 커뮤니티를 위한 프라이드하우스 만들기'를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 박동우



동성애 혐오 정서는 선수로서 삶을 옥죈다. 2014년도 시즌을 마지막으로 은퇴한 전직 미국 프로야구 선수 타일러 더닝턴은 게이다. 그는 지난 3월 <ESPN>과 인터뷰에서 "동료는 물론이고 코치들도 '게이를 죽이겠다'는 식의 말을 했다"고 뒤늦게 고백했다. 2015년 호주 게이 럭비 클럽(Sydney Convicts)이 영미권 운동선수 95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선 응답자의 80%가 동성애 혐오를 겪거나 목격했다고 밝혔다.


나이지리아 여자축구 국가대표팀의 유차리아 우체 코치는 2011년 <뉴욕타임스>와 한 인터뷰에서 "우리 팀의 레즈비언은 정말 큰 문제"였다며 "내가 '수퍼팰컨스(Super Faloncs·나이지리아 여자축구 국가대표팀의 애칭)'의 코치를 맡으면서 이런 문제들은 다 해결했다"고 밝혔다. 특히 세넷은 우체 코치가 "(레즈비언의) 더러운 삶에 관용을 베풀 수 없다"고 말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해외와 달리 우리나라는 아직 커밍아웃(자기 성 정체성을 공개하는 행위)한 선수가 없는 상황이다. 18일 강연 당시 한 참석자는 "선수 사이에 선·후배 위계가 강하기 때문에 그 집단에서 배제되면 스포츠 경기에 나서기 힘들어진다"고 꼬집었다. 합숙훈련 위주의 시스템은 경기 연습을 관리하는 효율성을 끌어올리는데 주안점을 둔다. 따라서 기존의 성적 관념에서 어긋난 행위는 팀의 기강을 해치는 것으로 곧잘 받아들여진다는 게다.


"누가 어떤 경기에 출전해서 경기력을 갖출 수 있는지를 근거가 되는 과학은 여전히 불완전한 상태입니다."


남성, 여성, 트랜스젠더, 인터섹슈얼도 아닌 성 정체성을 스포츠가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을까. 국제 스포츠에서 성별에 따라 경기를 나누지 않는 종목은 승마, 요트 등 일부에 그친다. 세넷은 더 많은 종목에서 성별 구분이 사라져야 한다는 의견이다. '공정성'이란 구실로 과도한 성 감별 검사가 이뤄지는 행태 또한 개선돼야 함을 역설했다.


그는 자기 지역사회에서 남녀 혼성 축구 경기를 즐기며 여가를 보낸다. 협동심을 기르고 자신감을 쌓는데 제격이란다. 선수의 성 정체성은 경기 진행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


7만 명의 시민이 손 잡은 까닭


▲세계 각국에 설치·운영된 프라이드 하우스 ⓒ 박동우



세넷의 표현대로 스포츠는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어 인권 문제를 다루기에 적합한 수단"이다. 누구나 즐길 수 있고, 쉽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점을 십분 활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지난해 공식 출범한 범세계 시민단체 '프라이드하우스 인터내셔널'이다.


국제 스포츠 대회 때 운동선수나 팬 등 성적 소수자들이 자유롭게 경기를 즐기고 친목을 나누는 장소인 '프라이드 하우스(Pride House)'를 만드는 이들이다. 스포츠계에 만연한 성차별과 동성애 혐오를 직시하자는 차원도 있다.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 당시 관광업자 딘 넬슨이 동성애자 선수 사진전과 영화 상영 공간을 꾸민 게 시초다.


2015년 토론토 범미주경기대회(팬아메리칸게임) 때 세운 프라이드 하우스는 가장 높은 관심을 끌었다. 대회 기간 중 3만1000명이 넘는 방문객이 다녀갔다. 파티, 회의, 콘퍼런스, 설치미술 작품 전시, 길거리 운동경기, 선수와 팬의 만남 등 각종 행사가 이어졌다. 성적 소수자 시민단체 '519 커뮤니티 센터'를 중심으로 정부, 지역사회가 힘 모은 결과였다. 델타항공, 캐나다 임페리얼 상업은행(CIBC), 맥주회사 몰슨 등 기업에서도 선뜻 자금을 댔다.


'스포츠를 통한 평등과 다양성의 진작' '인권 증진' '포용성 기르기' 등의 목표가 고꾸라질 뻔한 적이 있다.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 땐 개최지에 프라이드 하우스가 설치되지 못했다. 러시아 당국이 프라이드 하우스 개장을 불허한 탓이다. 올림픽을 1년 앞둔 시점에서 푸틴 정권은 이른바 '반동성애법'을 밀어붙였다. 미성년자에게 동성애 선전을 금지하는 내용이 골자였다.


프라이드 하우스 주최 쪽은 러시아 정부의 조치에 따른 대책을 모색했다. 평화적 저항을 통해 동성애가 탄압받는 상황을 알릴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나온 게 '동성 간 손잡기 운동'이다.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콘스탄틴 이아블로치스키 러시아LGBT스포츠연맹(RLSF) 공동대표였다. "모든 사람이 단순하지만 상징적인 제스처에 참여"할 수 있었다.


남자들끼리, 여자들끼리 손잡은 사진을 찍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렸다. 운동은 영국 맨체스터, 필리핀 마닐라 등 전 세계 각지로 퍼졌다. 2014년 2월 호주 시드니에서 '마디그라(Mardi Gras)' 동성애자 축제가 열렸다. 현장에선 7만 명에 가까운 참가자들이 서로 손을 잡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아시아 최초' 프라이드 하우스, 평창이 갈 길은 험난하다


▲2014년 2월 9일 호주 시드니에서 ‘마디그라(Mardi Gras)’ 동성애자 축제가 열렸다. 현장에선 7만명에 가까운 참가자들이 서로 손을 잡았다. 이들은 러시아 정부의 소치 동계올림픽 프라이드 하우스 설치 불허 등 동성애자 탄압 정책에 항의하는 의사를 표시했다. ⓒ 프라이드하우스 인터내셔널



내년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까지 대략 200일 남았다. 우리나라에서도 프라이드 하우스를 준비하는 움직임이 있다.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KSCRC)가 총대를 멨다. 하지만 넘어야 할 산이 한두 개가 아니다.


일부 기독교 단체를 위시한 반(反)동성애 세력이 건재하다. 스포츠 인권을 둘러싼 논의 주제는 여전히 물리적 폭력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스포츠계의 성적 소수자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이해는 아직 걸음마 단계다. 한채윤 KSCRC 활동가가 답답한 심정을 토로했다.


"캐나다와 러시아는 성적 소수자 스포츠 단체가 있어서 프라이드 하우스를 이끄는 동력이 됐는데, 우리나라엔 그러한 조직이 없거든요. 그리고 스포츠 인권 주제에 대한 논의가 진전돼 있지 않아요. 한국의 스포츠 인권은 '체벌하지 말라'는 수준, '코치더러 성추행하지 말라'는 정도로 돼 있기 때문에 국내에서 어떻게 이 이야기를 꺼낼 것인가 하는 고민이 있어요."


평창 동계올림픽 관계자들의 무관심도 아쉬운 대목이다. 지난겨울 KSCRC는 평창 동계올림픽 조직위에 프라이드 하우스 설치와 관련해 지원 의향을 묻는 공문을 보냈다. 한참 시간이 걸려 온 답변은 '어떠한 도움도 주지 않겠다'는 취지의 내용이었단다. 캔디 KSCRC 활동가는 "'도움도 주지 않고 방해도 하지 않을 테니, 너희들 알아서 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며 "그 이후 더 이상 조직위와 소통하지 않는 상황"이라 말했다.


세넷은 한국이 처한 현실적 여건에 맞춰 프라이드 하우스 개소를 추진할 것을 조언했다. 그는 폴란드와 우크라이나가 공동개최한 2012년 유럽축구선수권대회의 사례를 꼽았다. 당시 정부의 제약이 심했던 까닭에 2·3일만 프라이드 하우스를 열었단다. 작은 술집을 빌려 텔레비전으로 경기를 함께 시청했다는 전언이다.


"프라이드 하우스의 규모를 어느 정도 설정할 것인가에 너무 신경 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또 선수들이 과연 올 것인가, 어떤 사람들이 올 것인가 하는 부분에도 집중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오면 좋고 안 와도 상관없어요(웃음). 올림픽 기간 프라이드 하우스를 설치하고 운영한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많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평창 동계올림픽 프라이드 하우스가 모습을 드러내면 '아시아 최초의 프라이드 하우스'로 기록될 게다. KSCRC는 어떻게 프라이드 하우스를 운영할 것인지 다양한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한채윤 활동가의 설명이다.


"성적 소수자들이 모여 스포츠 경기를 보는 목적이 강하다면 서울에 있는 센터 사무실을 활용하거나 성적 소수자 업소를 빌릴 수도 있는 거고요. 평창에 프라이드 하우스를 열게 된다면 외국에서 온 성소수자 선수와 코치, 관람객들을 위한 안내의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겁니다. 예를 들어 다른 동성애자들을 만나고 싶어 하는 이들, 한국의 성적 소수자 인권 실태가 어떠한지를 알고 싶은 이들, 내가 성적 소수자들을 위해 도울 일을 찾는 이들을 위한 곳이 되겠죠."


성소수자 전문 SNS 회사 '플래닛로미오'는 2년 전 각국의 동성애자들을 대상으로 사회적 인식, 삶의 만족도 등을 조사했다. 우리나라는 127개국 가운데 57위에 그쳤다. 플래닛로미오는 "게이행복지수(GHI)는 국가의 자유, 정의, 안전의 발전 수준을 드러내는 지표"라 공언했다. 대한민국은 자유롭고 정의로운 나라인가.


강연 말미, 케프 세넷이 청중에게 질문을 던졌다. "여러분은 프라이드 하우스 평창이 어떻게 기억되길 바라십니까?" 이제 우리가 답할 차례다.


박동우 기자 pdwpd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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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연 2천 시간 일하고 병까지, 스물넷 정규직의 '대가'

[벼랑끝 청년빈곤 ③] 비정규직 전전하다 정규직 됐지만... 은희씨 삶은 '제자리걸음'


"저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 많으니까 다른 사람들과도 이야기 나눠 보세요." 한 청년이 인터뷰 내내 되풀이한 말이다. 새로운 사회의 출발선에 발을 내디딘 지금, 우리 청년세대의 절망은 짙고 깊은 골짜기에 있다. '88만원 세대'는 어느새 '77만원 세대'로 전락했다. 중산층 붕괴의 소용돌이에서 부모의 가난이 자식에게로 전이된다. 


가중되는 취업난의 복판에서 청년들은 저임금 비정규직으로 밀려나고, 그나마도 '하루살이 인생'인 단순노무직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청년들이 숨 쉴 틈이 있어야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고, 건강한 사회로 가는 길을 개척할 수 있다. 동시대를 사는 청년들의 목소리를 듣고 쓰기로 했다. 문제 해결을 모색하려면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 기자 말


▲안은희씨가 지난해 6월 서울의 한 병원에서 받은 신체검사 내역. '초음파검사', '수면 위내시경검사'에 붉은 형광펜으로 칠한 흔적이 보인다. 십이지장과 위 점막이 헐어 있었지만, 어느 병원도 정확한 원인을 알지 못했다. 은희씨는 그저 학습지 회사 지국에서 일하던 시절 받은 스트레스가 주범일 거라고 미뤄 짐작할 뿐이다. ⓒ 안은희



그는 예정된 시각을 20분이나 넘겨 인터뷰 약속 장소에 왔다. 맞은편엔 동국대 일산병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일주일 치 약을 타서 오는 길이었다. 안은희(가명·25·파주 금촌동)씨는 아프다. 벌써 2년 됐다. 구미에 사는 남자친구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온 날일 게다. 별안간 속이 더부룩했다. 먹은 끼니가 위장에 똬리를 틀고 내려가지 않았다.


동네 의원에서 위염약을 처방받아 먹어도 허사였다. 다른 병원에서 내시경 검사를 받았다. 십이지장과 위 점막이 헐어 있었다. 의료기술로 치면 내로라하는 서울대병원을 찾았다. 원인을 물었다. 의사는 모른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더 독한 약을 탔다. 커지는 건 통증의 강도였다. 이유 모를 경련이 함께 찾아왔다.


은희씨는 그저 미뤄 짐작할 뿐이다. 학습지 회사 지국에서 일하던 시절 받은 스트레스가 주범일 거라고. 그는 1년 7개월 동안 정규직 사원 신분이었다. 2013년 5월 입사하고 계약직 2년을 견딘 끝에 딴 열매였다.


일할수록 커지는 건 통증의 강도였다


오전 8시 30분에 출근해서 오후 7시에 퇴근하는 일상이었다. 한 달 가운데 열흘가량은 밤 10시가 돼서야 사무실을 나섰다. 어림잡아 연간 2700시간 이상을 사무실에서 보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2위인 한국 취업자들의 연간 노동시간(2273시간, 2015년 기준)을 훌쩍 뛰어넘는다.


월초엔 학습지 회원을 유치하는 '프로모션(판촉활동)'을 하느라 바빴다. 보험사 영업 활동과 비슷했다. 월말엔 그달의 업무 실적을 결산하고 납부된 회비를 정산하느라 쉴 새 없었다.


그나마 돈을 조금 더 받는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비정규직 시절엔 매달 봉급이 120만 원에 그쳤는데, 업체의 정식 가족이 되니 회사는 다달이 160만 원을 줬다. 은희씨는 줄곧 총무부서에서 근무했다.


맡은 일의 범위는 넓었다. 회의 자료와 파워포인트(PPT) 슬라이드 자료를 만들고, 각종 공문서를 제작했다. 엑셀 데이터 입력을 하는 것도 기본 축에 들었다. 고객의 입회 상담, 홍보 전단지 배포, 사무실 환경미화 작업까지 떠맡았다.


회사는 2015년 매출 6000억 원, 영업이익 547억 원을 달성한 대기업이다. 당기순이익은 595억 원이다. 전년보다 매출액은 1.2%, 영업이익은 6.8% 줄었다. 회사는 비용을 줄이려 안간힘을 썼다. 지난해 회사는 각 지국마다 뒀던 교재실장 자리를 없앴다. 아침 7시부터 낮 1시까지, 날마다 여섯 시간 근무하는 '파트타임' 일자리였다. 사라진 직책의 몫은 고스란히 은희씨에게 쏠렸다.


보통 한 지국마다 40~50명의 교사들이 속해 있다. 다행히 은희씨가 근무한 곳은 수도권에서도 제법 외진 동네였다. 매주 25명의 교사들이 회원 아동들의 학습 진도 현황과 요청할 교재를 손수 기록한 표를 총무부서에 냈다. 은희씨는 이를 모아 내부 통신망에 입력해 필요한 교재들을 본사에 청구했다. 각 선생님이 요청한 교재 종류와 수량에 맞게 배송된 교재를 분류했다. 어림잡아 400권에 육박하는 책더미를 뒤지는 건 고역이었다.


늘 채근하는 교사들이 있었다. "왜 제 것은 빨리 처리 안 해요? 서둘러 해주세요!" 신청한 순서대로 처리할 요량이었지만, 선생님들의 닦달 앞에선 여간 버티기 어려웠다. 심지어는 "진도 현황을 잘못 썼다"거나 "교재를 잘못 요청했다"고 교사가 알리면 쪼르르 교재실로 달려가 해당하는 책을 찾아 따로 빼놓기도 했다.


일이 불어났다.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워지는 업무량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그해 11월 말 사직서를 냈다.


"건강상의 악화 사유로 사직하고자 합니다."


▲지난해 11월 말 안은희씨가 회사에 낸 사직서 중 일부. 그는 "건강상의 악화"를 사유로 퇴사하겠다 밝혔다. 그는 유명 학습지 회사 지소에서 3년 7개월을 일했다. 이 가운데 1년 7개월은 정규직 사원 신분으로 지냈다. ⓒ 안은희



업체는 그에게 후임을 위해 업무 교육 자료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모니터 앞에서 하릴없이 PPT 슬라이드 자료를 만들고 있으니 속에서 울화가 터졌다. 화장실에 가서 '악' 소리를 질렀다.


자신이 입사할 땐 겨우 이틀 인수인계 받는 데 그쳤다. 직장 내부 교육(OJT)은 없었다. 은희씨는 거의 모든 업무를 직접 부딪쳐 가며 스스로 익히거나, 상사에게 물어봤다. 그런데 이제 와서 후임에게 체계적인 교육을 하고 가라니. 사표를 쓴 지 한 달이 넘은 12월에서야 그는 약 4년 몸담은 직장을 떠났다.


정규직으로 일한, 나이 스물넷에 원인을 알 수 없는 만성 질환을 얻었다. 은희씨는 회사를 나오기 열흘 전 페이스북에 글을 남겼다.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이 되면서부터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며 "내가 살기 위해 회사를 떠난다"고 선언했다.


비용절감 때문에 없앤 업무, 고스란히 떠맡아


우리나라 청년 10명 가운데 6명 이상이 어렵사리 구한 첫 직장을 1년 3개월 만에 그만둔다(2014년 5월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 은희씨도 첫 직장에서 1년 일했다. 법무사 사무소에서 총무부서 보조역을 맡았다. 관공서 민원 서류를 발급하는 사이트 '민원24'에 접속해 토지대장을 비롯해 각종 등기부등본을 대신 떼주는 일이었다. 그밖에 간단한 컴퓨터 문서 작업을 하면 됐다. 빠릿빠릿하게 움직인 덕에 편히 지냈다. 하지만 정규직으로 전환될 가능성은 없었다. 한 단계 높은 직급으로 오를 기회가 보이지 않았다.


직장을 옮겼다. 카드사로 갔다. 역시 1년간의 근무였다. 컴퓨터 모니터에 고객의 신용카드 신청서를 띄우고 오·탈자나 잘못 적힌 정보를 골라냈다. 하지만 은희씨는 카드사 직원이 아니었다. 외주업체에 소속된 파견직 신분이었다.


한 번 비정규직으로 일하면 평생 불안정한 직업을 맴돈다. 은희씨는 2월 말부터 유명 멀티플렉스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평일 오후 2시부터 8시까지 여섯 시간 근무해서 한 달 110만 원을 받는다.


근로계약서를 썼다. 사측은 11개월 근무할 것을 종용했다. 이른바 '퇴직금 꺾기' 관행이다. 아르바이트 노동자가 1년을 채우면 사업주는 퇴직금을 줘야 하기 때문이다. 은희씨가 일한 영화관은 위탁업체가 대신 운영했다. 본사는 직접 운영을 꺼렸다. 상업지구와 농촌이 뒤엉킨 소도시에서 영화관을 꾸려나가는 건 비용 부담이 크다고 판단했던 게다.


손님을 응대하는 특성을 감안해 회사는 남자 직원에겐 옥스퍼드 구두 또는 '로퍼' 타입의 검은색 신발을, 여자 직원에게는 스타킹을 신으라 했다. '피복비'라도 받을까 싶었지만, 지시에 따르는 비용 지원은 없었다. 3000원쯤 되는 스타킹을 매달 지갑 푼돈으로 샀다.


"허벅지 부위에서 스타킹이 찢어졌어요. 그런데 치마를 입으면 보이지 않잖아요? 무릎 아래 부분이 찢어지지 않았으면 그대로 신고 일하기도 해요. 새 것을 신으면 아깝기도 하니까."


▲청년빈곤에 따른 고통을 겪는 안은희씨 ⓒ 박동우



피복비는 직원 부담, '퇴직금 꺾기' 횡행


은희씨가 중학교 3학년이던 해, 일산에서 3층짜리 장어구이 식당을 운영하던 아버지의 사업이 기울었다. 200명 넘는 종업원을 거느리던 옛 시절은 신기루였다. 가족은 억대의 빚을 졌다. 채권자들이 빚을 갚으라 독촉했다. 부모님이 이혼했다. 은희씨는 엄마와 남동생, 세 식구끼리 삶을 이어나갔다.


파주엔 LG디스플레이 공장을 중심으로 각종 제조업체들이 여럿 들어와 있다. 어머니는 미술 전공을 살려 중소기업 제품 디자인 일감을 맡았다. 하지만 늘상 외주를 얻는 게 아닌 까닭에 수입은 들쭉날쭉하기 일쑤였다. 한 달에 많아야 160만~170만 원의 벌이론 남매의 학업을 지탱하기 어려웠다.


고교 시절부터 아르바이트에 나섰다. 문학 분야에 흥미가 많았지만, 대학에 들어갈 여유가 없었다. 2011년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다시 학업에 눈길을 돌린 때는 2015년 3월이다. 은희씨는 수도권 4년제 대학 국어국문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먹고 살려고 안간힘을 쓰면 어느새 전공 공부가 뒷전으로 밀려나 있다. 한창 격무에 시달릴 땐 1년가량 휴학했다.


"국어국문과는 제가 원하던 전공이에요. 출판사 쪽으로 가고 싶은데 모르겠어요. 워낙 거기도 경기가 안 좋다보니... 일단 지금은 당장 제 앞에 닥친 생계 문제가 제일 크죠."


반년 뒤 은희씨는 다시 구직시장의 문을 두드려야 한다. 아직 학교를 졸업하지 못했기에 이력서 상으론 '고졸' 청년이다. 약간의 초조함과 불안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믿을 건 한 회사에서 진득하게 근무했던 경력이다. 그러나 또래 친구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기업 채용에 소위 '빽'이 작용한다는 의심을 거둘 수 없다. 


"친구 아버지가 모 재벌 그룹 계열사 상무예요. 그런데 친구가 그 회사 사원으로 취직한 거예요. 실화예요. 걔는 원래 '금수저'예요. 4년제 대학을 나왔는데 전문대 졸업자 전형에 지원해서 붙었다는 얘기가 있어요. '얘는 아빠 잘 만나서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은희씨가 최근 유명 외국계 기업에 지원했다 떨어진 경험을 들려줬다. 고객지원 부서에 지원했다. 120명을 뽑는데 9000명 가까이 지원했다는 후문이다. 이력서에 형식의 제한은 없었다. 성별, 학력을 쓸 필요가 없었다.


업체는 서류 합격자들을 대상으로 25명씩 묶어 3시간 동안 집단면접을 진행했다. 현장에서 조별 과제를 내줬다. 각 조마다 종이를 건넨 다음 '만들고 싶은 가구'를 상상해 접어보라 했다. 가구를 생산하고 판매하는 기업다웠다. 면접이 재미있고 신선한 체험이 될 줄이야.


각 팀의 관리자가 면접관으로 배석한 가운데 세 명의 지원자가 방에 들어가 30분에 걸쳐 개인면접을 봤다. 면접관은 은희씨에게 오로지 직무와 관련된 질문만 던졌다. '어디 사느냐', '형제는 무슨 일 하냐', '결혼은 했느냐'며 개인 신상 묻기에 급급하던 천편일률 면접관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은희씨의 머릿속에 대기업에서 일하고픈 생각은 없다. 긴 노동시간과 밀려드는 업무량을 겪어보고 깨달았다. 그저 "내가 편하게 일할 수 있는 데"라든가, "스트레스를 덜 받고 일할 수 있는 직장"으로 가고 싶단다.


▲7일 서울 은평구청에서 열린 '은평 여성일자리 JOB GO 매칭데이'에서 한 고등학생이 서류를 작성하고 있다. ⓒ 연합뉴스



"스트레스 덜 받는 직장으로 가고 싶어요"


지난 2015년 한국고용정보원이 연구한 바에 따르면, 청년층에서 저임금 근로에 시달리는 이들의 비중(30%)은 5년 동안 제자리걸음이었다. 전체 임금근로자 가운데 27.4%(2010년 3월)에 달하던 저임금 근로자의 비율이 5년 뒤 24%로 내려간 것과는 대조된다. 세상은 질 낮은 일자리로 청년들의 등을 떠민다.


한때 박근혜 정부는 비정규직 근로자의 사용기간을 2년에서 4년으로 늘리려 시도했다. "말도 안 되는 처사"였단다. 기간을 늘리는 게 능사가 아니란 것이다. 


"법이 만들어지는 공간인데, 그 법을 악용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슬프네요."


은희씨는 '비정규직이어도 살기 좋은 세상'이 오기만을 기다린다. 언제쯤 올까.


"저는 오히려 비정규직이 정규직보다 임금을 더 많이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비정규직 자체의 일이 고정인 것은 아니잖아요. 일정 기간 근무해야 하고, 회사 여건에 맞춰 갑자기 잘릴 수도 있어요. 언제 잘릴지 모르는 존재잖아요. 그러니 더 불안하거든요."


박동우 기자 pdwpd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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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앙 기모띠', 선생님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

[페미니스트 키우기 ①] 초등성평등연구회 교사 3인방을 만나다


'페미니즘 열풍'을 넘어 '페미니즘 유행'이란 말까지 나오고 있지만, 아직 한국 사회에서 여성주의를 말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성차별이 일상에 공기처럼 스며들어있고, 젠더 문제를 터놓고 이야기하는 게 여전히 낯선 문화이기 때문입니다. 가정이나 학교 같은 공간도 예외는 아닙니다. 이런 환경에서 '성평등'의 의미를 제대로 아는 페미니스트로 자라나는 것, 그리고 페미니스트를 키워내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입니다. 각 분야에서 고군분투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편집자말]


의문이었다. 체육 시간 학교 운동장을 제집 마당처럼 뛰노는 이들은 남학생들뿐이었다. 여학생들은 쭈뼛거렸다. 끼리끼리 스탠드 주변에서 흙장난을 치거나, 웅성거리며 수다를 떨 뿐이었다. 늘 그런 상황의 반복이니 서느런 고정관념이 현장을 감았다. '여성의 신체는 약하기 때문에 여성은 체육 활동을 잘하지 못한다'거나 '남성이 여성에게 지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


서울 상천초 서한솔 교사는 묵은 편견을 부수기로 결심했다. 성별에 관계없이 공히 같은 기준을 적용했다. 혼성 달리기 시합을 벌였다. 남학생보다 더 빠르게 결승선에 들어오는 여학생들이 많았다. 몇몇 남학생들이 울먹였다. 한 아이는 대성통곡을 했다. 제자들에게 말을 건넸다. "운동을 잘하고 못하고는 개인의 특성일 뿐, 성별은 상관이 없는 거야." 여자에게 졌다해서 부끄러운 기분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당부였다.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명제들이 있다. 세상을 덮은 장막을 걷어내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사람들이 있다. 지난해 6월 19일 첫발을 뗀 '초등성평등연구회'다. 젠더감수성을 기르는 교육의 방식을 고민하고, 해법을 모색하는 단체다. 회장인 서 교사를 비롯해 인천 학익초 이신애 교사, 수도권의 어느 초등학교에 근무하는 솔리(가명) 교사 등 12명의 회원들이 뜻을 모았다.


지난해 서 교사는 초등학교 5학년 한 반을 대상으로 약 40차시(1600분)에 걸쳐 '성평등 수업'을 진행한 바 있다. 무엇이 그들을 실천의 길로 나서게 했을까? 학부모와 학생들은 그들의 실천에 어떤 마음을 지니고서 동참할까? 연구회가 지향하는 성평등 교육의 목적지는 어디일까? 우리 안의 차별을 극복할 수 있을까? 지난 4일, 서울 서초동의 강남역 10번 출구 인근 카페에서 서 교사·이 교사·솔리 교사를 만났다.


선생님들이 가장 듣기 싫은 말, '앙 기모띠'


"동의 없이 막 (팔을) 잡아당겨서 납치범 같을 것 같다." "여자가 꼭 아름답고 치장해야만 하나? 여자도 박력있을 수 있는데." "여자가 꼭 끌려 다니고 순진하지 않아도 된다." 학생들이 느낀 점을 술술 풀어냈다. 드라마 <상속자들> <후아유 – 학교 2015> <태양의 후예> 등 영상자료를 접했다. 학생들의 눈에 남성이 가자는 대로 다 따라가는 여성, 여성을 꾸짖는 남성, 남성에 의존적인 여성은 분명 성차별적 요소가 덕지덕지 붙은 캐릭터였다.


텔레비전, 컴퓨터를 끼고 산 어린이들의 시선은 자연스레 미디어가 차린 콘텐츠로 쏠린다. '걸그룹'의 전성시대라 칭할 정도로 온갖 여성 아이돌이 즐비하다. 동영상 플랫폼 '유튜브'의 급부상과 BJ(인터넷 방송 진행자) 열풍은 초등학생들의 주류 문화를 탄생시킨 일등공신이다.


이 교사는 "여학생들의 장래희망을 물어보면 제일 많이 나오는 게 BJ, 아이돌, 유튜버(유튜브 영상 제작자)"라고 말했다. 이를 두고 솔리 교사는 "(미국) 슬럼가의 흑인 아동들이 선망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건 농구선수나 래퍼 밖에 없기 때문에 장래희망으로 그 두 가지만 이야기한다"며 "여학생들이 선망의 대상으로 삼을 만한 사람이 미디어에 거의 그려지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초등학교 2~3학년부터 화장을 시작한다는 게 교사들의 후문이다. 대중매체는 아이들에게 새로운 화장법을 가르친다. 유튜브에서 '초등학생 화장', '초딩 화장'이란 열쇳말을 검색하면 3만 9천 건이 넘는 영상들이 쭉 나타난다. 여학생들 상당수가 문방구에서 500원짜리 틴트를 사다가 입술을 물들이거나, 화장품 가게에서 1만 5천 원짜리 선크림 팩트를 구해 볼에 윤기를 낸다.


실제로 2015년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이 펴낸 '화장에 대한 우리들의 인식' 보고서에 따르면, 초등학교 고학년 여자 어린이의 45%가 "화장을 한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서 교사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 뚱뚱하거나 소위 '못 생긴' 여성이 등장하면 굉장히 무시당하는 장면, 또는 그런 여성의 애정표현 때문에 상대방이 소름끼쳐하는 장면이 계속 나온다"며 외모 가꾸기 열풍이 아이들 사이에 번진 배경을 진단했다.


평소 학생들이 쓰는 말의 상당수가 외모와 관련돼 있다. 아이들은 선생님에 대한 호감의 표시로 '선생님, 예뻐요' 또는 '선생님, 오늘은 아이라인 그렸네요' 등의 말을 구사한다. 친구들끼리도 '너 얼굴 작아서 좋겠다', '못 생겼어', '네 얼굴 실화냐' 등의 평가가 오간다.


이 교사는 아이들과 함께 토론하며 학급 규칙을 제정했다. 외모에 대해 말하지 않기, 외모에 대한 칭찬을 하지 않기. 이 교사의 설명이다.


"'너 얼굴 작아서 좋겠다'는 말이 칭찬일지라도 결국 칭찬을 받지 못한 학생에게는 칭찬받은 친구가 선망의 대상이 되거나 자신이 우러러보는 대상으로 비칠 수 있어요. 게다가 칭찬받은 친구에겐 그 말이 외모를 유지해야 하는 규범으로 작동할 수 있기 때문에 외모와 관련된 칭찬은 안 해요."


특히 인터넷 방송은 여성 혐오 문화를 아이들의 마음 속에 단단히 붙들어 매는 공간으로 전락했다. 이 교사는 학생들이 "앙 기모띠('기분 좋다'는 의미로, 포르노에서 자주 쓰이는 표현으로 알려져 있다. - 편집자 주)"라는 말을 내뱉는 걸 접하곤 기겁했다. 처음엔 아이들이 야동(포르노)을 접하고서 인상에 남은 말을 따라한 게 아닐까 했단다. 알고보니 유명 BJ 철구의 유행어였다. 솔리 교사도 "전국의 초등학교 선생님들에게 어린이들이 하는 말 가운데 가장 듣기 싫은 말이 뭐냐고 물으면 1위가 '앙 기모띠'일 거라고 자신한다"며 맞장구를 쳤다.


이런 가운데 서 교사가 내놓은 게 여성과 관련된 욕설을 가려내는 '맨손수업(교재와 교구 없이 진행하는 수업)'이었다.


"문화의 주도권을 유튜브가 쥐고 있고, 거기엔 여성 혐오 정서가 흐르고 있어요. 아이들 입장에선 그것들을 되게 쿨하고 멋지다 생각해요. 학교에서는 거기에 대항할 문화가 있어야 하는데, 전혀 없는 상황이죠. 그나마 국어 교과서에 '선플달기운동'이 나와요. 게시판을 '누리집'이라 부르면서 매체에 대한 감상을 나눠보자 하는데, 대단히 한계가 있죠. 저희가 느끼기에도 되게 촌스러운데, 하물며 아이들은 어떤 감정을 느끼겠어요?"


대중문화를 통해 접한 여성 혐오 정서를 되돌아보는 한편, 어린이들만의 새로운 대안문화를 일구려는 의도였다. "이른바 '범생이'처럼 보이면 안 된다. 이것도 쿨하고 멋져야 한다."(지난 6월10일 서 교사가 쓴 트윗)


그래서 학생들에게 쪽지를 나눠줬다. 평소 쓰는 욕설을 적으라 했다. 욕설이 한데 모였다. 아이들에게 물었다. 친구 사이에 쉽게 쓰는 욕설과, 싸움 직전까지 갈 정도로 매우 화났을 때 쓰는 욕설을 분류해보라고.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아이들은 화가 치밀 경우 '미친 년' '씨발년' '니 애미 창년' 등의 욕을 뱉었다고 답했다. 아이들은 분노의 강도가 진할수록 여성을 다룬 욕설을 쓰고 있었던 게다. 서 교사는 "'씨발놈' '이 놈'은 친구끼리 가볍게 주고받는 농담처럼 쓰인 반면, '씨발년' '이 년'에는 진지한 분노가 깃들어 있더라"며 수업을 회고했다. 그는 욕설을 가려낸 아이들에게 물었다.


"너희는 성차별을 하는 사람들이니?"

"아뇨."

"성차별을 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너희들이 누군가를 여자로 부르면 더 심한 욕이 된다는 거네?"


교실엔 침묵이 감돌았다. 그때 서 교사가 제안했다. 유튜브의 각종 영상 속 욕설 댓글을 찾아 관리자에게 신고를 하자고. 아이들이 흔쾌히 동의했다. 컴퓨터실로 자리를 옮긴 아이들이 저마다 여성 혐오 욕설이 담긴 영상이나 댓글을 찾아 신고하기 시작했다.


평소 그런 성격의 영상을 즐겨보거나 욕설을 두루 쓰던 아이들이 두각을 드러냈다. 어떤 아이는 서 교사에게 이런 말도 건넸다. "요즘 뜨는 BJ가 있는데, 이 사람은 완전 '여혐(여성 혐오)'에 가까워요." 수업시간 학생들은 연대해 여성혐오 문화와 싸운 경험을 가슴 속에 아로새겼다.


인간의 사고를 구성하고, 사회 변동이 응축된 언어는 차별과 위계의 구습이 고스란히 반영된 산물이다. '남녀', '부부' 등 가치중립적인 단어에는 항상 남성이 앞에 오는 반면, '년놈' '암수' 등 부정적이거나 열등한 의미가 숨은 단어에는 늘 여성이 앞에 붙는다. '남중생'이란 말은 없는데 왜 '여중생'이란 말은 통용되는가. 연구회 교사들은 누구나 지나칠 법한 대상을 예리하게 포착한다.


'나의 고통' 자각하고, '타인 아픔' 이해하기


▲초등학교 5학년을 대상으로 한 '비판적으로 영상매체 감상하기' 관련 창의적 체험활동 교수·학습 과정안. ⓒ 초등성평등연구회



성평등 교육은 상대의 처지에 대한 이해와 공감에서 출발한다. 이 교사가 담임을 맡은 반 학생들과 함께 제정한 학급규칙엔 '좋아하면 잘해주기'도 포함돼 있다. 그는 "스토킹의 시작은 어린 시절 '아이스께끼(치마를 들추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을 좋아할 때는 최소한 그 사람이 기분 나빠하지 않는 방식으로 표현을 해야 바람직한 관계가 형성된다고 본다. 좋아한다는 이유로 상대를 괴롭히는 건 용인될 수 없다"고 의미를 풀이했다.


발달단계상 초등학교 저학년 어린이들은 억압에 순응하는 한편 '따라하기(모방)'에 익숙하다. 전통적인 성별 이분법을 '표준'으로 인식하는 아이들이지만, 그만큼 기성세대가 심어놓은 사고에서 벗어날 길이 주어지면 신속하게 그리로 몰려간다는 것이 교사들의 설명이다.


특히 아이들은 성평등 교육을 받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겪은 경험이 차별과 구분에 따른 고통이었음을 자각하게 된다. 솔리 교사가 말했다.


"2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성편견 극복 수업을 하고 난 뒤에 수업 소감을 나눴어요. 어른들이 '넌 왜 여자애가 덜렁대니?'라 물으면 '덜렁대는 것과 여자, 남자인 것은 상관없다'고 대답하겠대요. 어른들이 '남자애가 왜 우니?'라 물으면 '남자라고 꼭 울지 말란 법 없다'고 대답하겠대요. 이미 아이들은 성별 규범 때문에 많이 고통받고 있었어요. 이에 따른 구조적 문제를 비판할 언어를 주면 아이들이 이를 흡수해서 자신의 고통을 설명할 수 있는 거죠."


하지만 고학년으로 올라선 아이들이 처한 상황은 다르다. 몇몇 남학생들은 자신의 남성성을 자랑스러워하고, 기존 여성 혐오 문화에 적극 동조한다. 이들에겐 타인의 아픔을 둘러싼 공감대를 형성할 촉매가 필요하다.


교사들은 이 시기가 발달단계상 추상적 사고와 비판할 수 있는 힘을 얻는 때라는 점을 십분 활용했다. 서 교사는 자기 부모님을 인터뷰한 영상을 초등학교 4학년 아이들에게 보여줬다. 딸을 사랑하지만, 자식을 키우려고 내 직업을 포기하는 게 속상했다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텔레비전에서 울렸다.


어머니와 아버지, 각각의 임금곡선을 그렸다. 아버지의 봉급은 완만하게 증가했다. 어머니는 출산할 때마다 퇴사했다. 다른 회사에 재취업했지만, 예전 받던 임금보다 훨씬 적은 액수를 챙겼다.


아이들에게 물었다. "너희 집은 어떻니?" 한 아이가 답했다. "우리 엄마는 간호사고, 아빠는 의사예요. 저를 낳은 다음에 복직하려고 했는데 동생이 또 태어나서 아직까지 복직 못하고 계세요." 다른 아이는 여자가 더 아기를 잘 돌봐서 어쩔 수 없는 거 아니냐고 나름의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서 교사가 대뜸 말을 던졌다. "우리 반에서 아기를 돌볼 줄 아는 사람 손 들어보세요." 학생 몇 명이 손을 들었다. 서 교사가 질문했다.


"어떻게 알았지?"

"배웠어요."

"응, 그렇구나. 여학생이 배울 수 있는 것을 남학생은 배울 수 없는 건가?"


생각의 혼란을 겪는 어린이들은 그렇게 한 번 더 고민한다. 모성애와 사회적 성취욕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 여성의 감정을 상상하고, 실제로 확인한다. 소위 '유리천장', '성별에 따른 임금 불평등'의 민낯을 깨닫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치 않다.


"엄마가 '게이'는 나쁜 거랬어요"


▲부모의 임금 변화를 나타낸 꺾은선 그래프 자료. 초등학교 4학년을 대상으로, 성별간 임금 불평등 문제 등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성차별 문제를 짚는 수업에 활용됐다. ⓒ 초등성평등연구회



걸음마를 뗀 성평등 교육이 나아갈 길엔 돌부리가 가득하다. 전통적인 성의식 또는 왜곡된 성의식을 지닌 학부모 밑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그 사고회로를 물려받을 가능성이 짙다. 서 교사는 학생 간의 다툼을 놓고 상담한 학부모가 '우리 애가 남자애라 화를 참기 힘들어 한다'며 껄끄러운 상황을 모면하려 한 사례를 거론했다. 그는 "아이만의 책임을 성별의 보편적인 특성으로 돌리려는 것"이라 말했다.


솔리 교사는 여성적인 행동을 한 남자 아이를 놀릴 때 학생들이 '게이냐?'라는 말을 쓰는 것 또한 연장선상에 놓인 문제로 본다. 


"한번은 제가 '게이'라는 단어를 놀리는 말로 쓰는 이유를 물어봤죠. 그랬더니 돌아오는 대답이, '엄마가 게이는 나쁜 거라고 했다'는 거예요. '엄마와 선생님 사이에 의견이 다르군요' 이러고 끝났는데, 그렇게 되면 그 학생은 나중에 그 말을 또 쓰게 되거든요."


성인지적 관점을 반영한 어린이 도서가 너무도 적거니와 학습용 교재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는 점도 아쉽다. 연구회 교사들이 모여 도서 목록을 만들 요량으로 서점, 도서관을 수없이 드나들었다. 최소한의 수준으로 잡았던 스무 권에 훨씬 모자랐다. 목록을 만들기가 민망한 현실이었다.


지난 4월 계간지 <창비어린이>가 연 '아동문학과 여성주의' 세미나에선 2013년 어린이도서연구회가 선정한 동화책 161편을 분석한 통계가 제시됐다. 이 가운데 여자 어린이가 단독 주인공으로 등장한 동화는 28편(17.4%)에 불과했다. 남자 어린이가 혼자 주인공을 맡은 동화(46편·28.6%)에 견줘 보면 낮은 수준이다.


그나마 여자 아이가 나온 주인공으로 나온 동화는 초등성평등연구회 교사들의 기대에 못 미쳤다. 남자 주인공이 나오는 동화처럼 현실의 제약이나 난관에 얽매이지 않고 여자 주인공이 당당하게 모험에 도전하는 이야기를 원했지만 실상은 이와는 거리가 멀었다. 열두 살 소녀가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경기 연습을 하며 사춘기 성장통을 이겨내는 동화 <롤러 걸> 빼고는.


서 교사는 "대개 이야기의 주제가 따돌림, 관계나 연애와 관련돼 있다. 상당수 히트작들이 가족과의 관계, 친구와의 관계, 선생님과의 관계 등 나의 관계가 망가졌는데 이를 좋게 만들고 싶다는 내용이었다"고 평했다.


연구회 교사들은 직접 어린이 도서를 쓰기로 계획을 잡았다. 한 교실에서 일 년 동안 벌어지는 다양한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그려서, 학생들의 공감을 모으겠다는 생각이다. 이 교사가 자세하게 구상을 풀었다.


"저희가 초등 교사니까 교실에서 수집할 수 있는 사례도 많고, 아이들이 무엇에 흥미를 갖는지도 알아요. 각 장마다 외모, 신체 변화, 성인이 됐을 때의 진로 선택, 진로 선택에 따른 경력 단절, 그 과정에서 모성애가 어떤 방식으로 강요되는지, 아이들이 시청하고 향유하는 콘텐츠에 깃든 문제점 등을 줄거리로 엮을 수 있겠죠."


'12.8세'에 첫 경험 갖는데 '올바른 성관계' 가르치지 않는 공교육


▲초등학교 저학년을 대상으로 두 어린이와 그에 맞는 옷을 고르게끔 하는 그림 자료. 여성과 남성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동기유발 학습에 쓰였다. ⓒ 초등성평등연구회



지금의 공교육 현장엔 2015년 교육부가 6억 원을 투입해 연구한 결과물이 있다. '학교 성교육 표준안(지도안 포함)'으로, 성교육의 가이드라인 역할을 지닌다. 학생의 발달단계별로 종합적이고 전반적인 이해가 깃든 성교육을 하겠다는 취지였다.


연구회는 이에 대해 분석 작업을 시행한 바 있다. 인터뷰에 나선 교사들은 이를 두고 "쓰레기"로 규정지었다. 솔리 교사의 호흡이 가빠졌다. 


"여성주의적인 언어로 말하자면 성별 이분법적이고요. 조손가정, 다문화가정, 한부모 가정을 고려하지 않은 채 반복적으로 4인 가족(부모와 두 자녀)이 등장하는 등 '정상가족 신화'를 강화하고 있어요. 성 엄숙주의를 강화하고 있고요, 특히 여성에 대해서만 성적 억압이 심합니다. 게다가 성폭력에 대해선 '피해자 비난'을 하고 있어요."


가장 논란이 되는 지점이 성폭력 대목이다. '강간'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설명하지 않는 등 성폭력의 개념을 모호하게 서술한데다, '친구가 원치 않으면 만지지 않는다'는 정도로 언급함으로써 성폭력이 얼마나 나쁜 행위인지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폭력을 피하는 방법만 나올 뿐, 막상 그 일이 닥쳤을 때 피해자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재하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이 교사는 "외국에선 성폭력에 직면했을 때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가르친다. 성폭력을 당하지 않는 방법만 가르치면 아이들은 막상 그 상황이 닥쳤을 때 적극적으로 저항할 수밖에 없고, 그러다 죽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서 교사는 "성폭력을 당한 아이에게서 '내가 따라가지 않았더라면', '내가 싫다고 크게 말했더라면'이라는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도록 교육이 짜여 있다. 피해자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아이와 관계 형성이 미약한 아이라면 상대방에게 혼날까봐 두려워서 말을 꺼내지 못할 것이다. 무엇보다 성폭력에 대해 다루면서 성폭력을 해서는 안 된다는 교육을 하지 않는데, '성교육 표준안'을 제대로 된 교육으로 볼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수업에 앞서 학생들의 동기 유발을 꾀하는 방식도 현실과 매우 동떨어져 있다는 평이다. 이 교사는 음란물 예방 교육 사례를 끄집어냈다. '음'으로 시작하는 단어 말하기, '란'으로 시작하는 단어 말하기, '물'로 시작하는 단어 말하기. 이러한 방식을 권한다는 것이다.


"음악, 란제리, 물총. 세 단어를 주고 공통점이 무엇인지 물어요. '음'으로 시작해요. '란'으로 시작해요. '물'로 시작해요. 정답이 뭘까요. 음란물이랍니다. 일반인이 봐도 웃음이 나올 법한 내용이죠. 굉장히 촌스럽죠. 아무도 그렇게 가르치지 않아요."


인체의 생식기를 이해하는 수업도 실소를 금치 못한다. 학생들에게 '고환', '음경' 등의 이름을 붙이고, 서로 공을 주고받는다. 공을 받은 이는 공을 던질 상대에게 인사를 건네야 한단다. "안녕, 고환아?"


이 교사는 "시작하는 순간 교실이 초토화가 될 것"이라며 깔깔거렸다. 솔리 교사는 "남성 성기인 '음경'과 '고환'은 나오면서 '소음순' 같은 여성의 외부 성기는 가르치지 않는다"며 황당하다는 듯 표정을 지었다.


성관계를 시작하는 평균 연령이 12.8세까지 낮아진 상황(2013~2015년 청소년 건강행태 온라인조사 결과)에서, 표준안은 학생들이 성관계를 맺을 가능성조차 염두에 안 둔다. 교사들은 이른 나이에 성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점을 전제하되, 어떻게 하면 안전한 성관계를 도모할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서 교사는 외국의 사례를 들며 운을 뗐다.


"프랑스에서는 '첫 경험에 대해 상상해보기'라는 주제로 저학년에서 수업을 진행하거든요. 그런데 우리 남자아이들 같은 경우는 첫 경험에 대한 이미지를 '야동'을 통해 얻잖아요. 그 이미지는 '분출'이에요. 내가 콘돔을 끼고 사정해서 상대를 이기고 지배하는 거예요. 내가 사내로서 인정받고 남자로서 존경받기 위한 의식으로 돼 있어요. 그런데 첫 경험은 그런 게 아니잖아요.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 준비 과정을 거쳐 굉장히 로맨틱하고 아름다운 경험으로 승화해야 하는 거예요."


이 교사도 '어린이들을 성적 존재로 바라보지 않는' 표준안을 비판했다. 


"많은 여자들이 첫 경험을 치른 뒤 죄책감을 느껴요. 저는 처음에 '엄마'를 생각했어요. 내가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못하고 파괴당했다는 느낌인데, 남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잖아요. 여자들은 내 것을 남자에게 줬다, 바쳤다는 식으로 생각하게 되는데, 그러면 안되는 거죠. 사랑하는 사람끼리 서로 하는 행위인데, 한 사람은 정복감을 느끼고 다른 한 사람은 죄책감을 느끼게 되는 게 일반적이라면, 이는 공교육에서 이야기를 해볼 수 있는 주제죠."


이들은 성교육 표준안이 하루빨리 폐지돼야 한다는 데 중지를 모았다. 현장 교육을 맡은 이의 자율성을 통제하는 데 쓰인다는 이유에서다. 솔리 교사는 "일선 교육청에서 배포 지침을 내고 '동성애' 언급을 하지 말라고 명시한 적이 있다. 예를 들어 학생이 '게이냐?'는 말을 했을 때 게이가 놀림거리, 배제할 존재가 아니라 우리 주변에 있을 수 있는 존재이므로 이해해야 한다고 교육하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는 셈"이라며 고충을 토로했다.


"'모범생'은 고정관념... 여교사는 술·담배·섹스 못하나?"


지난해 5월 '강남역 10번 출구' 인근에서 여성을 상대로 한 묻지마 살인사건은 단체 결성의 동력이 됐다. 초등교사 온라인 커뮤니티인 '인디스쿨'엔 수업 보조자료가 풍부하기로 유명하다. 그런데 성평등 교육, 특히 개중에서도 사회적 측면에서 문제를 다룬 자료는 없었다. 서 교사가 제안 글을 올렸다. 여성 혐오 정서의 확산, 여성 대상 범죄 증가, 구조적 성차별의 심화와 관련해 교육현장에서 적극적인 성평등 교육이 필요하다고. 함께 할 사람을 찾는다고. 서 교사가 단 글은 삽시간에 조회수 2300건을 넘었다. 대다수가 호응하고 응원을 보냈다.


단체를 결성한 뒤 이따금 언론사와 인터뷰한 기사가 인터넷에 선보였다. 그 다음 날 학교엔 항의전화가 걸려오기 일쑤였다. '맨박스(남성을 둘러싼 고정관념)'에 갇힌 남성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여실히 방증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몇몇 남성 교사들이 어깃장을 놓는 것이 가장 뼈 아팠다. 어깨동무하며 우군이 되리라 믿었던 기대가 깨진 순간이었다. '왜 교사가 이런 일을 하죠?', '학생들에게 특정 이념을 주입하는 것 아닌가요?', '아이들의 생각이 자란 뒤에 성평등 교육을 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 토론 교육 제안, 동화책 쓰기 모임을 제안했을 때도 달리지 않던 비판 댓글들이 눈에 띈 게다.


"기존의 맨박스에 더해 학교 내부에서 남성 교사들이 소수라는 점에서 스스로 느끼는 고통이 얹어져 있기 때문에 굉장히 피해의식을 느끼는 거죠."(솔리 교사)


"저는 그래서 더 이해해줄 줄 알았어요. 바깥 사회에선 여성이 소수적 위치에 놓인 성별이고 남성이 주류적 성(性)이라면, 교사집단에선 오히려 남성이 소수적 성(性)이잖아요. 짐을 옮기는 데 동원되거나 때때로 힘든 업무를 맡기도 하니, 여성들이 사회에서 겪는 고통을 이해할 수 있을 줄 알았어요."(이 교사)


초등학교 교사 열 명 중 여덟 명(76.7%)이 여성이다. 그러나 수적 우위가 젠더 권력의 우위를 뜻하진 않는다. 여전히 이 땅의 여교사들은 기성 사회가 주조한 모델을 따를 것을 요구받는다.


기성세대는 술, 담배, 섹스를 멀리하는, 전형적인 모범생의 이미지를 소환한다. 순응적이고 유약할 거란 예단은 막상 교사가 학생을 엄하게 혼냈을 땐 '여교사답지 않게 학생들을 휘어잡는다'는 평가로 연결된다. 서 교사가 속내를 털어놓았다. 


"여교사는 모순적인 요구를 계속 받아요. 성교육할 땐 섹스에 대해 빠삭하게 꿰고 있어야 돼. 하지만 개인적으론 섹스를 알아선 안 돼. 여교사는 모범적인 인생을 살아왔을 거라 기대하는데, 실제 인생이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잖아요. 내 삶을 조각내서 아이들에게 일화로 들려주며 설명을 해요. 그런데 그게 내 삶이 아닌 거예요. 탈권위적이고 평등한 페미니스트로서 약자를 존중하고 싶은데, 이 사회에서 내가 '1인자'로서 권위를 갖지 않으면 오히려 약자를 보호할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거든요."


가부장제의 규범에 찌든 남성들이 여성을 하대하는 행동은 인간이 인간을 상대로 행하는 권력 행위의 말단이다. 상당수 교사들에겐 일상적 경험이다. 이 교사는 지난해 학교 회계 업무를 맡았다. 급식비 등 학부모들이 대는 각종 비용 처리를 살피다 보니, 자연스레 민원 전화가 끊이질 않는다.


전화를 받을 때 그는 꼭 한 마디를 덧붙였다. "교육의 질 향상을 위하여 모든 통화 내용이 녹취되고 있습니다." 유독 반말로 묻거나 대뜸 욕설부터 하는 민원인들이 많았단다. 올해 그 업무는 남자 교사에게 넘어갔다. 몇 달이 지나 물었다. 나는 민원인들 전화로 스트레스 많이 받았는데, 당신은 그런 것 없냐고. 돌아온 대답에 이 교사가 깜짝 놀랐다. '그런 적이 전혀 없었다'고 했다. 남자가 전화 응대를 하자, 폭언을 하는 민원인이 눈에 띄게 줄었다는 게다.


"성평등교육은 '세상을 바라보는 틀'... 사막에 나무 심는 기분"


국책연구기관 '여성정책연구원'에서 지난해 3월 '한국은 누구에게 살기 좋은 나라인가'라는 질문을 던진 결과를 선보였다. 남성 청소년, 대학생, 직장인 집단에서 공통적으로 '2030세대 여성'이 큰 수혜를 보고 있다고 답했다. 이 교사의 표현대로 "자신을 두들겨 팬 대상에게 화를 내지 않고, 가만히 있는 옆 사람에게 화를 내는 격"이었다.


"여자가 좋은 일자리 독차지한다", "여자는 왜 군대 안 가냐", "출산이 벼슬이냐"는 식의 핀잔을 주는 청년들이 눈에 띈다. 여성을 하위의 존재로서 격하시키고, 2등 시민인 양 얕잡아본다. 지금의 어린이들이라고 무사할 것인가. 여성 혐오 문화가 다음 세대에 고스란히 전승될 수 있는데, 두렵지 않은가.


서 교사가 담담하게 말했다. 자신들은 "지고 있다"고. 열심히 가르쳐도 이내 기존의 주류 문화에 포섭돼 다시 성차별적 언행을 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종종 본다. "너무나 미미해요. 패배의 기록을 지금도 계속 봐요."


하지만 성평등 교육을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틀"로 정의 내린 솔리 교사의 생각은 달랐다. 자신들의 활동이 '사막에 나무를 심는 일'과 같다고 밝혔다.


"내가 하는 일이 과연 이 아이의 미래를 얼마나 바꿔 놓을까 하는 의심이 끊임없이 들어요. 사막에 나무를 심어봤자 말라 죽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사막에 나무를 심는 게 선생님들이 하는 교육의 본질이라 생각해요. '내가 나무를 심었기 때문에 사막이 넓어지지 않은 거야'라고 굳게 되뇌죠."


이들이 실천하는 성평등 교육은 어느 범주에도 들어갈 수 없었다. 솔리 교사의 설명을 듣고 나니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수시로 들춰볼 참고서와 같은 것일지도 몰랐다.


"기존에 우리가 옳다고 하는 지식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 있게 해주고, 억압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의문을 제기할 수 있게 해줘요. 나아가 여성의 불평등을 뛰어 넘어 모든 불평등과 연결지어 이야기할 수 있어요. 더 평화적으로, 민주적으로, 동등한 처지에서 인간과 인간이 관계 맺는 방법을 고민하는 거예요."


서 교사는 자신을 향해 "매일 실패하는 직업"이라며 혼잣말했다. 그러면서도 "일단 부딪쳐봐야 하는 문제"라는 말을 덧붙였다.


이프섬 감옥에 갇힌 '에드몽 단테스'는 땅굴을 파서 탈출을 감행하다 옆방의 이웃 죄수 파리아 신부를 만난다. 속내를 털어놓지 못한 이들이 조우했을 때의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아직 게임은 끝나지 않았다. 늦은 밤 강남역 10번 출구는 인파로 북적였다.


박동우 기자 pdwpd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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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조현병'과 '중졸'의 굴레… "계속 살자니 토할 것 같아요"

[벼랑끝 청년빈곤 ②] 월 100만 원 벌며 가족까지 부양해야 하는 심경환씨


"저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 많으니까 다른 사람들과도 이야기 나눠 보세요." 한 청년이 인터뷰 내내 되풀이한 말이다. 새로운 사회의 출발선에 발을 내디딘 지금, 우리 청년세대의 절망은 짙고 깊은 골짜기에 있다. '88만원 세대'는 어느새 '77만원 세대'로 전락했다. 중산층 붕괴의 소용돌이에서 부모의 가난이 자식에게로 전이된다.


가중되는 취업난의 복판에서 청년들은 저임금 비정규직으로 밀려나고, 그나마도 '하루살이 인생'인 단순노무직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청년들이 숨 쉴 틈이 있어야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고, 건강한 사회로 가는 길을 개척할 수 있다. 동시대를 사는 청년들의 목소리를 듣고 쓰기로 했다. 문제 해결을 모색하려면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 기자 말


▲청년들은 지금 절망하고 있다 ⓒ pixabay



부산 동구의 한 문화시설에서 일하는 심경환(가명·29·부산 범일동)씨는 종일 안내데스크에서 죽쳤다. '지역공동체 일자리 사업'이라는 명목을 내건 구청은 그에게 '시설물 관리'와 '경비' 업무를 맡겼다. 


경환씨는 일주일에 나흘 그곳으로 출근한다. 한 달 100만 원을 버는 청년구직자다. 지난 연말에는 평일 내내 구청에 나가 업무 서류를 정리했다. 그간 숱하게 많은 일터를 찾아다녔지만 허사였다. 편의점 계산원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하루 만에 점주는 "나가라"고 면박을 줬다. 일하는 게 시원찮았나 보다. 최근엔 유명 가구 업체에서 대리점 판매직을 뽑는다기에 지원서를 넣었다. 면접을 보고 사전 교육까지 받았다. 합격하나 싶었다. 결국 그는 낙방했다.


어려운 가정 형편, 정신적인 상처까지...


초등학생 시절부터 어리숙해 보이고 만만하다는 이유로 친구들은 그를 무시했다. 학년이 오를수록 급우들의 따돌림이 할퀸 생채기는 켜켜이 쌓였다. '찐따'라는 가시 돋친 말이 에워쌌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두려웠다. 경환씨는 결국 다니던 고등학교를 자퇴했다.


먹고 살기 급급한 가정 형편 때문에 심연에서 올라오는 상처에 연고를 바를 적기를 놓쳤다. '조현병(정신분열증)'과 '망상증'이 덮쳤다. 바깥을 나가는 경환씨의 눈에는 모두가 자신더러 "못났다"며 수군대는 사람들 투성이였다. 외출하기가 무서웠다. 점점 방에 틀어박혀 지내는 시간이 길어졌다. 무기력한 일상이었다.


약을 먹었다 끊었다를 반복했다. 4년 전부터에서야 비로소 약을 꾸준히 먹고 있다. 끼니마다 세 종류의 알약을 먹는다. 나른하지도, 졸리지도 않는다. 약이 자신을 끌어당기는 기분이 못내 찜찜하다.


▲청년빈곤에 따른 고통을 겪는 심경환씨 ⓒ 박동우



경환씨는 "지금 받는 월급이 150만 원으로 오르면 좋겠다"며 속내를 드러냈다. 현재 100만 원의 벌이에 포함된 식비는 한 끼의 가격을 3000원으로 매긴다. 편의점 도시락이 4000원에 육박하고, 돼지국밥 한 그릇이 6000원을 넘긴 마당에 이 정도 식비는 짜다. 하는 수 없이 집에서 싸온 밥과 컵라면으로 식사를 때우기 일쑤다.


어둠을 지나면 과연 신새벽이 올까. 가족은 올해가 돼서야 판잣집 신세를 벗어났다. 슬레이트 지붕과 콘크리트 벽돌을 두른, 번듯한 단독주택이다. 50㎡(15평) 남짓 되는 면적의 집은 보증금 100만 원에 월세 15만 원을 내고 살고 있다.


경환씨는 창고를 자기 공간으로 쓰던 과거와 달리 제대로 된 '내 방'을 얻어서 기쁘다. 간이용이긴 하지만, '가족만의 화장실'이 생긴 점도 만족스러웠다. 예전 살던 집엔 화장실이 없었다. 집을 나와 공중변소에 가야 했다. 대변이 마려울 땐 쓰레기통에 비닐을 깐 채 볼일을 봤다.


경환씨 가족은 경기도 부천을 떠나 2003년 이곳에 터를 잡았다. 그가 사는 범일동엔 6·25전쟁 당시 피란민이 몰렸다. '조국 근대화'를 외치던 시절엔 노동자들이 모였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부산에서 주거환경이 열악하기로 손에 꼽히는 동네가 됐다. 세간 사람들은 '시간이 멈춘 마을'이라 불렀다. 도심 속 무인도. 밤만 되면 사방이 고요하다. 별안간 부부싸움이 나서 유리창이 깨지고 경찰이 오가면 그나마 사람이 사는 동네라는 게 실감 났다.


간절한 소망, '자립'


▲지난 22일 심경환씨가 사는 부산 동구 범일동의 모습. 슬레이트 지붕을 머리에 인 단층주택들이 즐비한 가운데, 너머엔 대기업 브랜드의 중산층 아파트 단지가 한눈에 들어와 대조를 이룬다. 세간 사람들은 범일동을‘시간이 멈춘 마을’이라 불렀다. ⓒ 심경환



가난의 파도는 경환씨의 집에도 밀려들었다. 네 식구인 가족의 한 달 수입은 경환씨 월급에, 간호조무사로 일하는 여동생이 벌어오는 돈 130만 원을 더해 230만 원에 불과하다. 내일모레면 칠순을 앞둔 경환씨 아버지는 공사장 일용직 노동자지만, 나이 탓에 통 일감 구하는 게 벅차다. 어머니는 시각장애 1급이다. 2004년 한쪽 눈이 갑자기 아프다며 통증을 호소했다. 병원을 전전했다. 고통의 원인을 알 수 없었다. 끝내 시력을 잃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반대편 눈으로도 앞을 볼 수 없게 됐다.


생계가 어려워지자 부모님은 급한 대로 신용카드를 통해 대출을 받아 버텼다. 600만 원의 빚이 생겼다. 10년째 밀린 빚만큼 회사의 독촉도 끈덕지다. 사설 대부업자들도 줄기차게 이들을 잡고 늘어졌다. 공과금, 통신비, 식료품비, 약값을 내다 통장이 바닥나자, 사채에 손을 뻗은 게 화근이었다. 아버지는 시도 때도 없는 전화 공세에 시달렸다.


빚은 가파르게 불어나는데 소득은 턱없이 적었다. 전기료·수도료·통신요금 고지서를 두고 벌벌 떨었다. 어떻게든 아껴야 했다. 그런데 요새 어머니의 몸이 부쩍 여위었다. 영양실조가 의심된다. 부모님의 병치레는 금전적 부담을 동반한다. 경환씨는 가족을 부양하면서 예기치 않게 돈이 빠져나가는 상황이 두렵다.


나아질 듯하면서도 나아지지 않는 상황. 발버둥 치는데 서 있는 자리는 그대로다. 그는 장차 캠퍼스 강단에서 사회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고 싶다. 오랜 소망이다. 하지만 중졸이다. 아직 검정고시를 치르지 않았다.


"최소한 고졸이라도 맞춰야 하죠. 가방끈이 짧아서 하루빨리 늘려야 돼요."


경환씨의 마음 한 구석엔 '자립'에 대한 간절한 소망이 자리 잡았다.


"여기서 계속 살려니 토할 것 같아요. 늦어도 내년까지 종잣돈을 모으고, 2년 뒤에는 완전히 나가야겠단 생각을 하는데, 그게 생각대로 될지 모르겠습니다."


박동우 기자 pdwpd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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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난의 늪' 빠진 청년... "청포도 사탕으로 끼니 때워"

[벼랑끝 청년빈곤 ①] 어머니가 20년 된 차 있다는 이유로 기초수급자도 못 돼


"저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 많으니까 다른 사람들과도 이야기 나눠 보세요." 한 청년이 인터뷰 내내 되풀이한 말이다. 새로운 사회의 출발선에 발을 내디딘 지금, 우리 청년세대의 절망은 짙고 깊은 골짜기에 있다. '88만원 세대'는 어느새 '77만원 세대'로 전락했다. 중산층 붕괴의 소용돌이에서 부모의 가난이 자식에게로 전이된다. 


가중되는 취업난의 복판에서 청년들은 저임금 비정규직으로 밀려나고, 그나마도 '하루살이 인생'인 단순노무직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청년들이 숨 쉴 틈이 있어야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고, 건강한 사회로 가는 길을 개척할 수 있다. 동시대를 사는 청년들의 목소리를 듣고 쓰기로 했다. 문제 해결을 모색하려면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 기자 말


▲실업자는 아니지만 사실상 실업자로 여겨지는 취업준비자가 사상 처음으로 70만명을 넘어섰다. 이날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 5월 기준 비경제활동인구 중 취업준비자는 73만5천명으로 전년 동월(65만6천명) 대비 13%(8만5천명) 증가했다. 사진은 지난달 15일 오후 중구 서울시청년일자리센터. ⓒ 연합뉴스



수도권 3년제 전문대를 다니는 이대윤(가명·25·부천 원미동)씨가 내민 손을 맞잡아준 곳은 제3금융권 대부업체였다. 2학년 1학기 무렵, 러시앤캐시 장학재단에서 장학생을 선발한다기에 냉큼 교수의 추천을 받아 지원서를 넣었다. 현금으로만 300만 원을 손에 쥐었다. '행복 나눔'의 이름을 단 장학금이었다.


역설적이게도 그의 발목을 붙잡은 곳 또한 대부업체다. 어머니가 밀린 공과금을 낼 요량으로 대윤씨의 이름을 빌려 '대학생 대출'을 받은 것이다. 24.9%의 이자율을 조건으로 두 군데서 1500만 원을 빌렸다.


국가장학금을 생각 안 한 것은 아니다. 신청했지만 아르바이트에 갇힌 삶은 학업을 뒷전으로 밀었다. 한국장학재단에 신청해봐야 성적 기준(직전 학기 평균 B학점 이상)에 못 미쳤다.


매달 아르바이트로 버는 돈은 들쭉날쭉 제각각이다. 원리금을 상환하는 데 다달이 25만 원을 쓴다. 대윤씨는 "신용불량자인 어머니의 은행 계좌가 정지돼 있는 데다, 나보다도 돈을 못 벌 때가 있다"며 "매달 내는 돈이 아깝긴 해도 한꺼번에 갚을 목돈이 없으니 어쩌겠느냐"며 허허거렸다.


그는 차라리 나라에서 집안이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것을 공인해주길 바랐다. 고민하다 어머니에게 말을 꺼냈다. 차상위계층이나 기초생활수급자 신청을 해보자고. 한부모 가정이니까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고.


세무서로 가서 소득금액증명원을 뗐다. 어머니 소득이 한 해 600만 원에 그치는 것으로 나왔다. 그런데 뜻밖의 문제에 부닥쳤다. 몇 년 전부터 의류 원단과 기성복을 업계에 배송하는 일을 하고 있는 대윤씨 어머니에겐 자동차가 꼭 필요하다. 그래서 20년 전에 나온 중형차를 몬다. 차량의 내구성이나 현재 가치로만 따지면 '마티즈'보다 못 나가는 차였다. 하지만 국민기초생활보장 지침을 근거로 두면, 배기량이 1600㏄보다 많은 차량인 탓에 재산 기준을 충족하지 못했던 것이다.


대윤씨 어머니는 1990년대 퍽 이름 있는 의상 디자이너였다. 전용 의상실을 둔 채 활발하게 사업을 확장했다. 서울 도심에 건물을 3채나 보유했다. '일찍 터트린 샴페인'을 제대로 맛봤던 셈이다. 옛 사진첩을 한 장씩 넘기면, 젖먹이인 자신이 가족과 함께 유럽, 남미, 북미 등 전 세계를 두루 여행한 흔적이 즐비했다.


운명의 1997년, 외환위기를 맞닥뜨렸다. 이들 가족도 '중산층 가정의 삶이 송두리째 바뀌었다'는, 전형적 서사를 비껴가지 못했다. 채권자들이 벌떼같이 달려들었다. 하루아침에 사업이 망했다. 건물을 잃었다. 사업의 재무·회계를 책임지던 아버지가 대부분의 부채를 떠안았다. 온 가족이 빚의 무게에 눌리는 사태만은 막아야 했다. 선택지는 '이혼'뿐이었다.


그에게 장학금 준 곳은 '러시앤캐시'였다


▲청년빈곤에 따른 고통을 겪는 이대윤씨 ⓒ 박동우



어머니는 파출부, 떡집 아르바이트 등을 하며 살림을 이어나가려 애썼다. 그래 봐야 한 달에 100만 원 안팎 되는 돈으론 가족들의 삶을 지탱하기에 버거웠다. 대윤씨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겹벌이를 하며 생계전선에 뛰어들었다.


야간자율학습이 없는 고교였던 까닭에 수업을 마치는 오후 5시면 쏜살같이 교문을 나서 저녁 내내 아르바이트하는 일상을 반복했다. 전단지를 돌리고, 인형탈을 쓰고서 판촉에 나서기도 했다. 격주로 자정부터 다음날 아침 7시 30분까진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했다.


유독 어른들은 알바를 자처한 청소년들에게 쌀쌀맞았다. 급여 지급이 밀리는 건 예사였다. 이명박 정부 2년 차 최저시급은 4000원이었다. 하지만 노동현장의 사업주들은 2000~3000원밖에 안 되는 푼돈을 줬다. 근로계약서를 썼는지 기억조차 없다. 애초 안 썼으니 기억할 리 없다. 그러나 항의하지 못했다. 노동부에 신고하는 방법과 절차를 잘 몰랐던 데다, 자칫 신고했다간 고용주가 어깃장을 놓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깃들어 있었다.


그가 고깃집에서 손님에게 음식을 갖다 주고 불판을 닦는 일을 할 적엔 어이없는 '협박'을 당하기도 했다.


"고깃집에서 아르바이트한 지 석 달 지난 때였어요. 어느 테이블의 불판을 바꿔주고 돌아서는 찰나에 술 거나하게 취한 아저씨가 '자네 학생 아니냐'며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소주를 더 갖고 오라'는 거에요. 그때는 소주 한 병에 1000원이었는데, 그냥 제 돈 털어가지고 술을 갖다드렸죠."


평일 내내 하루 대여섯 시간씩 일하고 70만~80만 원을 받았다. 10만 원은 동생 용돈으로 떼주고, 나머지는 오롯이 집안 생활비로 쓰라며 어머니에게 건넸다.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한 그해 대윤씨의 동생이 태어났다. 아버지의 이름도, 얼굴도 모른 채 자란 동생은 어려서부터 "아빠가 보고 싶다"는 말을 자주 되뇌었다.


초등학교 시절 언젠가 동생 반에서 '아빠와 함께 하는 수업' 행사를 연 적이 있다. 교실 뒤편에 늘어선 중년 남성들 틈바구니에서 돋보이는 건 어린 대윤씨와 그의 어머니 둘뿐이었다. 그날 이후로 같은 반 친구들이 그의 동생을 향해 "아빠 없는 애"라며 놀려댔단다. 주눅 들고 방황하는 동생을 위해 대윤씨는 형이기에 앞서 아빠이자 가장으로서 책임을 짊어졌다.


"저는 사춘기가 없었던 것 같아요. 질풍노도의 감정을 겪지 않았어요.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간 것도 있었고요. 다른 애들처럼 남들에게 반항하는 모습이 없었어요."


2015년 군을 전역하고 원미동 본가를 찾아갔다. 무심결에 연 휴지통에서 구겨진 딱지 하나를 발견했다. 가스요금을 여러 달에 걸쳐 내지 않아 가스 공급이 중단될 거라는 요지였다. 화들짝 놀란 대윤씨는 어머니를 향해 "어떻게 된 것이냐"며 그간 벌어진 일들을 말해달라고 추궁했다. 밀린 전기·가스요금이 열 달 치나 쌓여 있었다. 수백만 원은 족히 넘어 보였다. '신용불량자' 어머니는 한사코 자기가 갚겠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경제활동에 종사하던 대윤씨가 2년 동안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는 동안 가정의 기반은 산산조각 났다. 신용대출을 받는 것도 모자라 러시앤캐시에서 받은 장학금을 본가에 부쳤다. 편안하게 대학을 다니나 싶었던 그의 바람도 날아갔다.


거의 텅 빈 통장 잔고를 접한 대윤씨의 마음속엔 자괴감, 후회, 암울한 감정이 밀려왔다. 삶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할 것 같은 마음에 대뜸 번개탄을 산 적도 있다.


"장학금을 받았을 때 하늘에서 준 기회라 생각했어요. 그게 바로 사라지고 다시 땡전 한 푼 없게 된 거예요. '등록금을 어떻게 마련하지? 또 학자금 대출을 받아야 하나?'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쉴 여유가 없었다. 주말마다 택배 물류센터 배송차량에 짐을 옮기고 나르는 일을 했다. 첫 주가 지나자 윗몸 전체에 근육통이 번졌다. 몸을 조금이라도 움직일 성싶으면 가슴과 등이 바늘로 찌르듯 저렸다. 그는 파스도 붙이지 않고, 스트레칭을 몇 번 하는 것으로 쑤시는 통증을 감췄다.


일터에서 대윤씨는 막내였다. 대부분 마흔 살을 족히 넘긴 아버지뻘 사내들이었다. 어린 나이에 아르바이트를 한다며 다들 예뻐했단다. 그래서일까, 고마운 기억들이 많다.


날마다 자취방에 데려다주던 아저씨가 있었다. 언젠가 "밥을 잘 챙겨 먹지 못하는 것 아니냐"며 걱정하더니 집 근처 마트에 들러 계란 한 판, 삼겹살 두어 근, 바나나를 사더니 손에 쥐어주곤 제 갈 길을 갔단다. 눈물이 핑 돌았다.


대윤씨는 빈털터리가 돼 거의 한 달 가까이 사탕과 물로만 배를 채운 적도 있다. 처음엔 보름 분량으로 잡고 청포도맛 사탕 한 봉지를 샀다. 아침에 눈을 뜨면 1.5ℓ 생수의 절반을 벌컥 들이켰다. 한꺼번에 사탕 세 알을 입에 털어넣고 혀로 살살 녹였다. 그렇게 삼시세끼를 버텼다. 금세 배고프면 사탕을 집어먹었던 탓일까. 어림잡아 120개 정도 든 사탕 봉지를 일주일 만에 뚝딱 비웠다. 한 봉지에 5000원 정도 했으니, 2만 원으로 배고픔을 달랜 셈이다.


한겨울 영하 17℃까지 기온이 내려간 날이었다. 숨만 쉬어도 수염에 고드름이 맺힐 듯한 강추위였다. 대윤씨가 옷장을 열었다. 늘 입던 패딩점퍼가 없었다. '찢어져서 세탁소에 수선을 맡겼지.' 하는 수 없이 트레이닝복을 여러 벌 겹쳐 입은 채 물류센터로 향했다. 우스꽝스러운 외양이 흡사 만화 주인공 '쾌걸 근육맨'을 연상케 했다. 그렇게 일하는 걸 힐끗 본 몇몇 아저씨들이 패딩점퍼를 거저 줬다. 아들에게 사랑을 쏟는 아비의 부성애가 이런 건가 싶었다.


생계-취업 스트레스가 부른 '돌발성 난청'


▲지난 24일 이대윤씨가 자신이 다니는 학교 작업실에서 졸업작품 제출작을 수정하고 있다. 그는 졸업작품을 게임 회사 취업 준비에 필요한 포트폴리오로 활용할 계획이다. ⓒ 박동우



친구들도 이런 그의 사정을 잘 안다. 대윤씨는 올 2월부터 네 친구가 사는 반지하 주택에 얹혀 지내고 있다. 부엌, 거실, 방 두 칸, 화장실을 갖춘 집은 연세로 600만 원이 든다. 보증금 없이 1년 치 월세를 집주인에게 한꺼번에 낸다. 룸메이트들이 150만 원씩 갹출했다. 보태줄 돈이 없는 대윤씨는 가뜩이나 좁은 공간에서 먹고 자는 것이 미안해서 자는 시간을 뺀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 작업실에서 보낼 때가 잦다. 


빚 갚으랴, 생활비 벌랴, 취업 준비하랴 정신이 없다. 다른 동기들은 3학년 과정을 마치고 졸업하는데, 그는 차라리 한 학년을 더 다니기로 마음먹었다. 어정쩡하게 졸업하느니 확실하게 실력을 쌓고 나가겠다는 결심이다.


대윤씨는 요즘 졸업작품 제출작을 다시 매만지는 데 온 힘을 쏟고 있다. '3D 맥스(Max)' 프로그램으로 컴퓨터 게임 속 캐릭터와 사물의 형체를 그리고 다듬는다. 두 발로 걸어 다니는 뿔소의 모습을 한 '타우렌'을 닮은 괴물이 주먹을 휘두른다. '그래픽 디자이너'를 꿈꾸는 그의 손놀림으로 탄생했다. 열세 명의 팀원들이 뭉쳐 다섯 달 동안 판타지 액션 게임을 만들었다.


비록 1등에 오르진 못했어도 포트폴리오로 쓰기엔 딱 좋은 작품이다. 작품에 밴 리소스를 보완하면 게임회사 실무진들이 눈여겨볼 게다. 게임 시연을 영상으로 편집해 제출하면 금상첨화다. 상당수 업체들이 게임 제작 본연의 소질을 갖췄을 뿐만 아니라 마케팅에도 재능이 있는, 소위 '융합형 인재'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중학교 시절부터 컴퓨터 게임이 좋았다. 중세 시대 성채를 배경으로 창병, 궁수 등을 길러내 끊임없이 돌진하는 적군들을 물리치는 플래시 게임을 손수 만들기도 했던 게 대윤씨다. 고교 시절 게임 관련 학과를 가겠다 선언했을 때 어머니는 퉁명스레 반응했다. "학과가 아니라 게임 중독자들의 모임 아니니?" 그것은 자신의 진로를 둘러싼 편견을 내쫓는 싸움의 시작이기도 했다.


인문계 일반고교 1학년 시절 6~7등급 언저리에 있던 내신 성적을 3등급(2학년), 3학년 들어선 1등급 후반대까지 끌어올렸다. 성적이 수직 상승했다. 또래 친구들이 "인간 승리의 드라마"라며 엄지를 추켜올렸다. 수시 1차 전형에서 학생부 성적 등 서류만으로 당당히 합격했다. 학사시스템 홈페이지에 접속해보니 1000점 만점에 998점을 받았다. 입학할 때 총장상을 탔다.


보고 들은 바로는 게임 업계는 학벌로 구직자의 점수를 매기지 않고 오로지 실력 본위로 자웅을 겨루는 곳이다. 지도교수의 세심한 피드백을 거쳐 포트폴리오를 완성하고, 일자리 추천을 받아 직장에 들어가는 게 최적의 시나리오다. 그런데 요샌 초조한 감정이 적잖이 든단다. 졸업작품 1등을 거머쥔 동기들 아홉 명이 골고루 엔씨소프트, 넥슨 등 유수의 기업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마음 같아선 국가 지원과 연계한 직업교육 프로그램을 받아보고 싶은데 기회가 너무 적어서 안타깝다. 친구가 "교육도 듣고 나랏돈도 받을 수 있다"며 소위 '게임 아카데미' 학원 강좌를 권했다. 일정한 출석률을 달성하면 30만 원가량의 지원금을 탄다는 것이었다. 귀가 솔깃했다. 그러나 선착순 신청이 발목을 잡았다. 문턱에도 못 갔다.


그렇다고 인턴을 하자니 실력 향상과는 거리가 먼 일 투성이였다. 제대한 뒤 집안에 문제가 터지기 전까지 두 달가량 광고 회사에서 월 120만 원을 받으며 영상 그래픽 작업 보조역을 맡았다. 실상은 달랐다. 서류를 정리하고 팀의 일정을 관리했다. 광고에 쓸 만한 CG효과의 예시가 될 만한 영상을 수집했다.


쌓인 불안은 몸에 이상을 만들고, 청년의 삶을 갉아먹는다. 2주 전이었다. 별안간 오른쪽 귀가 막힌 느낌이 들었다. 다음 날은 더 먹먹해졌다. 3일째 되던 날부터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음성변조된 것인 양 들렸다. 텔레비전 화면 속으로 들어간 듯한 느낌이었다.


이비인후과에 갔더니 의사가 '돌발성 난청'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예전 같았으면 중년 남성들이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얻는 질병이다. 대학교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보란다. 비루한 신세인 대윤씨는 "그냥 여기서 진료받으면 안되겠느냐"며 복걸했다. 일곱 종류의 검사 가운데 한 가지 검사만 받고 나흘치 약을 처방받았는데 비용이 3만 원 들었다. 모든 검사를 다 받으면 13만 원을 내야 했는데, 생각만 해도 아찔했단다.


빚은 아직도 600만 원이나 남았다. 언제 취직할지 기약할 수 없다. 전역을 앞둔 동생도 곧 있으면 캠퍼스에 복학한다. 등록금을 벌어다 줘야 할 판이다. 괴롭다. 


"앞으로 3년 동안은 이 상태가 유지될 것 같아요. 옛날엔 바늘 구멍만큼 보였는데 지금은 아예 보이질 않네요."


박동우 기자 pdwpd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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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서른일곱 여성 장관, '안연생'을 아시나요?

'사진'조차 없는 제5대 공보처장... 주연 대신 '조연'의 이름을 기억했으면


장관 인사를 둘러싼 말썽이 연일 지면을 달군다. 내친 김에 역대 대통령들의 장차관 인사 명단을 정리하기로 결심했다. 매일 밤 자기 전 예닐곱 명의 학력, 경력, 출신, 성별, 평가 등을 표에 빼곡하게 채운다.


대통령기록관 누리집에서 유일하게 사진이 없는 이가 있었다. '안연생'이었다. 제5대 공보처장이었다. 후신인 문화체육부 누리집을 뒤져봐도 사진란에는 회색 인간의 모습만 박혀 있다. 세간 사람들에겐 전혀 낯선 인물일 것이다. 그나마 아는 이들조차 '안연생'보다 '안중근 의사의 조카딸'로 기억한다. 포털사이트, 연합뉴스 인물정보 등을 들여다봐도 그의 생애를 기록한 정보조차 없었다. 오직 옛 신문 기사들로 조금이나마 유추할 뿐이었다.


▲문화체육부 홈페이지에도 안연생 장관의 사진은 없다. 심지어 여성임에도 남성 정장을 입은 형태로 그려져 있다. ⓒ 문화체육부 누리집 갈무리



중국에서 태어나 상해 복단대학을 졸업, 이후 미국으로 건너갔다. 안 선생은 고미술에 깊은 관심을 지녀, 지식인들은 그를 '조선 도자계의 권위자'로 추켜올렸다. 유창한 영어 실력 덕에 전란 와중에 유엔총회 한국대표단의 일원으로 프랑스 파리를 다녀오기도 했다. 당대 언론이 장택상에게 '국무총리' 직함을 붙일 때 서른일곱 여성 안씨에게는 '안연생양'이라 불렀다.


1953년 초 단 두 달여 짧은 처장서리 재임 기간이었다. 그는 자신의 소임을 묵묵히 해냈다. 어쩌면 그는 '걸크러쉬'의 원조격이었을 지도 모른다. 중장년 남성, 미국 유학파 출신 일색이던 전임 공보처장들과 대비되는 새파랗게 젊은 여성 공보처장. 당대 관점에선 파격이었음에도, 그의 삶은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호명받지 못한 게 어디 고위 관직에 등용된 이들 뿐일까. 장삼이사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설움을 겪었다. 어느 교회의 담당 목사가 들려 준 일화를 소개한다. 


16년 전 첫 담임목사 부임 시절 집사들 이름을 외우는데 열중이었는데, 나이 든 집사 할머니 이름이 '이씨'였다고 한다. 왜 그런고 사연을 들으니 부친이 아기를 보고선 "또 딸이냐?"며 핀잔을 줬단다. 이름 짓기도 한사코 싫다 하는 바람에 할머니의 이름은 성씨만 덩그러니 남았다. 나중에 할머니의 부군이 세상을 떠난 뒤 장례를 치를 때가 돼서야, 그의 자제들이 이름을 지어달라고 교회에 청했단다. 장로와 집사들이 한데 모여 '이은총'이라는 이름을 지어줬고, 며칠 뒤 그 할머니도 부군을 따라 제 이름을 안고서 소천했다는 게 이야기의 고갱이다.


'이씨'라는 이름은 부르기 위한 호칭이었을 뿐, 그의 정체성과 인격을 넓게 담은 이름이 아니었다. 몇 년 전 뇌리에 진하게 남은 인도영화 <굿모닝 맨하탄>이 떠오른다. 영어강사 데이비드가 샤시를 향해 "당신은 기업가(Entrepreneur)"라며 말을 건넨다. 평범한 가정주부 샤시는 자투리 시간을 내어 라두(인도 전통 후식)를 만들어 판다. 하지만 가족은 샤시의 소질을 얕잡아 본다. 'Entrepreneur'란 단어는 단순히 기업가, 사업가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창의력을 발휘해 아이디어를 짜내고, 이를 통해 혁신을 이루는 사람이자, 발명하는 사람을 지칭하기도 하다. 영어강사의 한 마디에 샤시는 한없는 기쁨을 느낀다. 집안에서 하찮게 여기던 일이 비로소 '사업'으로 인정받게 되고, 가치로운 행위로 격상된 것이다.


수많은 나비들이 날개를 퍼덕이지만, 날갯짓은 그저 눈에 스칠 뿐이다. 수많은 사투와 노력이 그저 순간의 몸짓으로 옷깃을 스친다. 무대의 배경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기억한다. 용상 뒤의 병풍으로 취급된 사람들의 존재를 길어 올린다. 유리천장에 막혀 좌절한 이 땅의 여성들이 그랬고, 당당히 업적을 일궈 냈음에도 통념과 편견에 밀려난 소수자들이 그랬다. 제 성과를 '자기 것'이라 감히 부르지 못하고 직장상사에게 헌납하는 수많은 인턴과 신입사원들이 존재한다. 


그들의 이름이 호명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우리들 각자의 존재는, 그 자체로도 반짝반짝 빛나므로.


박동우 기자 pdwpd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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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노룩패스' 김무성보다 더한 국회의원, 여기 있습니다

보좌진 상대로 한 국회의원 '갑질' 천태만상... 전문가들 "국회가 직접채용해야 문제 해결 가능"


▲당시 사건을 보도했던 MBC 뉴스 화면 ⓒ MBC 뉴스



영등포 일대가 꽉 막히긴 28년 전에도 매한가지였다. 10월이 저무는 일요일 낮이었다. 영등포4가 캠브리지 양복점 앞길엔 기아차에서 내놓은 세단 '콩코드' 한 대가 서 있었다. 차 주인은 평민당 양성우 의원(당시 지역구는 서울시 양천구 을)이었다.


중앙예식장에서 지역구민의 결혼식 주례를 마치고 나온 양 의원은 깜짝 놀란 채 의경을 맞닥뜨렸다. "여긴 편도 3차선 도로입니다. 그런데 2차선 차도에 주차하셨네요. 교통 소통에 방해가 되니 차를 빼주십시오." 불법주차 딱지를 떼려던 경찰과 시비가 붙었다. "누구 차인 줄 알고 이러는 거야?" 양 의원이 의경의 얼굴에다 주먹을 날렸다.


손찌검을 지켜보던 100여 명의 시민들이 분노했다. "국회의원이 근무 중인 경찰관을 폭행할 수 있는 겁니까!" 양 의원이 황급히 차에 올랐다. 군중 사이를 헤집고 달아날 참이었다. 화난 시민들이 콩코드를 둘러쌌다. 의경이 차량 보닛 위에 올랐다. 차는 30m를 질주했다. 의경이 아스팔트 바닥에 나자빠졌다. 1989년 10월 30일 <동아일보>는 이를 '특권의식'으로 규정했다.


국회의원들의 '갑질', 김무성 의원뿐만이 아니다


김포공항 출국장 문이 열렸다. 그의 시선은 앞을 향해 있었다. 기민하게 손이 움직였다. 오른쪽 대각선 방향으로 바퀴 달린 연두색 여행가방을 휙 밀었다. 마중 나온 수행원이 달려나왔다. 재빠른 몸짓으로 이를 받았다. 당사자는 바른정당 김무성 의원(부산 중구·영도구)이었다.


시민들은 '김무성 캐리어'를 주요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상위권에 올려주는 것으로 응답했다. '노룩패스(No Look Pass)'라는 생소한 스포츠 용어가 널리 퍼졌다. 농구 경기에서 상대 수비수를 속이기 위해 시선의 반대 방향으로 공을 넘기는 동작 말이다.


김 의원은 "(게이트 안쪽에서) 비서가 보이길래 가방을 밀어줬다"며 "왜 이게 잘못됐느냐"고 반문했다. 이를 두고 윤종빈 명지대 교수(정치외교학)는 "일반 국민들이 볼 때는 그게 굉장히 권위적인 행동이었다"며 "본인이 '갑질'로 비치는 행동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이 지적해도 그것이 잘못됐다는 걸 인식하지 못하는 점이 더 위험하다"고 꼬집었다.


새삼 여야 의원들의 '갑질' 관행이 입길에 오르내린다. 의원 본인의 사적 용무를 보좌진에게 시키며 갑질을 부린다는 말들이 심심찮게 돈다. '갑질'의 근간에는 공사 구별이 희미하다는, 의원실 특유의 근로 문화가 자리잡고 있다.


▲지난달 23일 오후 일본에서 귀국한 바른정당 김무성 의원이 서울 김포공항 입국장에 도착하며 마중 나온 관계자에게 캐리어를 밀어 전달하고 있다. ⓒ 연합뉴스



'종교 기도문' 대필 시키고, 손녀 돌잔치 행사 동원도


자유한국당의 한 의원실에서 일하는 A보좌관은 "보좌진에게 자기 집 앞마당 잔디를 깎으라고 시킨 의원이나, 심지어는 손녀 돌잔치 행사 보조역을 맡긴 의원도 있다고 들었다"고 밝혔다. 지난 5월 25일 페이스북 페이지 '여의도 옆 대나무숲(아래 '여의도숲')'에는 "자기 종교 기도문까지 직원이 쓰는 건 아니지 않느냐"며 "신앙까지 외주화하다가, 정작 천국은 내가 갈 것 같다"는 글이 올라왔다. '여의도숲'은 국회 보좌진들이 익명으로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는 게시판과 같다.


19대 국회 때는 보좌진에게 "개밥을 챙기라"고 지시내린 의원이 있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현역 재선인 이 야당의원은 원래 살던 집에 키우던 개가 있었는데, 휴일에 별안간 보좌진에 연락해선 "지역에 내려가서 개밥을 줘라"고 당부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자기 자식을 향한 뒷바라지가 과한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여당의 한 의원실에서 일하는 국회 경력 5년차인 B보좌관은 "어떤 행정비서는 의원의 자녀 학업 관리를 도맡아 하더라"며 혀를 찼다. 당의 최고위원을 지낸 어느 중진의원은 라면, 고추장 등 가공식품을 잔뜩 사다가 택배 부치는 일을 보좌진에게 시켰다는 후문이다. 외국에 유학 나간 자녀가 현지 한국 식품점에서 직접 사는 게 비용상 저렴한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단다.


그 중진의원은 한술 더 떴다. 2~3년 전 한강 둔치에서 음식축제가 열린 적이 있었다. 자녀가 거기서 요리 판매 부스를 열었다. 일손을 돕게 할 요량으로 보좌진을 보냈다고 한다. 수행비서를 시켜 식재료를 나르는 일에 관용차를 동원했다. 행정비서는 하루 종일 음식을 만드느라 진땀 뺐다는 얘기가 회자된다.


'국회판 최순실'은 공무에 간섭하고, 의원은 욕설 난사


▲심지어 보좌진에게 욕설까지 퍼붓는 국회의원도 있다. ⓒ pixabay



권위의식이 몸에 밴 행태도 눈에 띈다. 국회를 출입하는 C기자는 인터뷰에서 "퇴근 시간 의원회관 로비 앞에 늘어선 검은색 차량에 의원이 올라탈 때 보좌진이 차문을 열고 닫아주며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광경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고 귀띔했다. 보좌진들은 이런 '폴더 인사'가 양반 축에 낀다고 설명한다.


툭 하면 보좌진들에게 폭언을 퍼붓는 의원도 있다. 2년 전 B보좌관은 업무 협조를 구하려 다른 의원실을 찾아갔다. 이야기를 나누는데, 대뜸 맞은편 사무실 한복판에서 여성 의원이 "이 개xx들아! 거지xx들보다 못한 xx들!"이라며 자기 방 보좌진들을 상대로 호통을 쳤단다. 방 너머 소리를 듣던 행정비서가 모니터를 뚫어져라 보며 한 마디 했다. "저 방 또 저래. 예사로 있는 일이에요." B보좌관의 전언이다. "아무리 잘못을 했어도 그 정도까지의 욕설을 하는 건 아니잖아? 인격 모독 수준이더라고."


'국회판 최순실'도 곳곳에 있다. 의원 부인이 공공연히 업무에 참견한다는 말들이 의원회관에 돈다. 국회 상임위원장을 지낸 여당 중진 의원의 아내는 행정, 일정 관리 등 보좌진 업무의 일거수일투족을 확인하고 감시한단다. 운영비 등 자금의 지출 내역을 들여다보고 사사건건 따지는 통에 보좌진들은 해명하느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최근 '여의도숲'에 올라온 얘기는 자못 허허한 감정마저 들게 한다. 대선 캠프에 파견됐다가 의원회관으로 복귀한 첫날 회식을 했다. 식사 자리에 함께 한 '의원 사모'가 모든 직원이 들으라는 투로 나를 겨냥해 "넌 아직 멀었다"는 말을 했다는 게 사건의 요지다. 글쓴이는 "아직 부족하고 배울 거 많은 건 인정하지만 선거 치른다고 고생했다는 말을 건네는 게 우선 아니냐"며 "주말도 반납하고 출근하면서 쌓인 피곤함과 서러움이 한꺼번에 밀려온다"고 심경을 토로했다.


'보좌진=수족' 통념 벗어야... 전문가들 "국회가 직접채용해 의원실에 파견해야"


▲국회의사당 건물 ⓒ pixabay



보좌진들은 국회의원들의 '갑질' 행태를 최전선에서 맞닥뜨린다. 자신이 몸담은 회사를 평가하는 글을 올리는 익명 커뮤니티 '잡플래닛'엔 전·현직 국회 종사자 86명의 신랄한 지적들(2014년 4월~2017년 5월)로 가득했다. 어느 직원은 "국회의원은 직원을 단순한 소모품으로 생각한다"며 "의원이 나가라고 하면 나가야 하는, 정말 '초파리' 같은 목숨"이라고 썼다. 다른 직원은 "보좌진은 '파트너'일 뿐, '사노비'가 아니라"며 하소연을 늘어놨다.


전문가들은 국회 보좌진 채용과 면직 권한을 국회사무처로 완전히 이관시키는 방안을 주장한다. '보좌진=국회의원의 수족'이라는 통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취지다. 그래야 의원들도 공과 사를 엄격히 가릴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일개 의원에 종속된 고용관계에서 해방된 보좌진들은 전문적 역량과 정책 생산성을 높이는 데 주력하는 계기가 마련될 것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윤종빈 명지대 교수는 기자와 한 통화에서 "의원이 직접 고용하는 형태가 바뀌지 않는 이상 문제가 근절되지 않을 것"이라며 "사무처에서 보좌진으로 가용할 수 있는 인재풀(pool)을 만들어놓고, 사무처에서 보좌진과 직접 고용 계약해 의원실에 파견하는 형태가 근본적인 처방이 될 수 있을 것"이라 내다봤다


홍금애 법률소비자연맹 기획실장은 "어느 날 갑자기 쫓겨나니까, 면직 통보를 받으면 한 달 동안 유예 기간을 달라는 요구도 보좌진들 사이에서 나온다"며 "실질적으로 보좌진들을 정규직화하는 노력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동우 기자 pdwpd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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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국제]한국 찾은 일본인들 "일본 국회의사당 앞에 소녀상 세워야"

매년 5월 수요집회 찾는 '헌법9조 세계로 미래로 연락회' 사람들 "일본 정부, 성실하게 사죄해야"


볕이 쨍쨍했다. 집회 현장 위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늘을 선사할 구름은 없었다. 스즈키 유코(35, 경기 부천)의 두 볼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일행 중 다른 이는 회색 외투를 머리에 둘렀다. 건너편엔 경찰버스 넉 대가 줄지어 서 있다. 은박으로 감싼 배기관이 도로에 드리웠다. 시동을 켠 버스에서 휘발유 타는 냄새가 풍겼다. 코를 찔렀다.


한 무리의 외국인들이 땡볕도 마다않고 두 시간 가까이 자리를 지켰다. 24일 낮 서울 종로구 중학동 옛 일본대사관 건너편에서 집회가 열렸다. 제1284차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수요시위였다. 200여 명 넘는 참가자들이 '공식사과 법적배상' 구호가 적힌 노란 손팻말을 들었다.


스즈키씨 일행 가운데 대여섯 명이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질서유지선 앞에 도열했다. 하얀 현수막을 펼쳤다. 현수막엔 분홍 나비, 보랏빛 나비가 넘실댔다. 우리말과 일본어로 된 글귀가 한눈에 들어왔다. 


"한일 '합의'는 해결이 아니다. 우리들은 평화와 인권을 위해서 걷는 할머니들과 함께 나아가겠습니다."


양노자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사무처장은 이들이 '헌법 9조 세계로 미래로 연락회(약칭 '9조련')' 회원들이라 귀띔해 줬다. 지난해엔 수요집회를 주관하기도 했단다. '전쟁 포기'를 못박은 일본 헌법 9조를 지키는 이들이었다. 반전(反戰) 운동과 평화 사상을 추구하는 일본 시민들이 모여 이룬 단체였다.


'부천댁' 스즈키 유코, 학창시절 옥선 할매 사연 접하고...


▲기세 게이코 9조련 사무국장(맨 왼쪽)과 스즈키 유코(맨 오른쪽) 등 '헌법9조 세계로 미래로 연락회(약칭 '9조련')' 회원들이 2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중학동 옛 일본대사관 앞 수요집회 현장에서 흰 현수막을 들고 있다. 현수막엔 "한일 ‘합의’는 해결이 아니다. 우리들은 평화와 인권을 위해서 걷는 할머니들과 함께 나아가겠습니다"는 글귀가 우리말과 일본어로 쓰여 있다. ⓒ 박동우



열다섯 명의 일행이 수요집회 전날 입국했다. 회원들과 7년 전부터 알고 지낸 스즈키씨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길동무를 자청했다. 이들이 서울에서 일정을 보내는 동안 행선지 안내를 하고 통역에 나섰다.


그는 가나가와 현 북동부에 자리잡은 대도시 가와사키 출신이다. 학창시절 부천시와 가와사키시 사이 양국 고교생 교류 모임 '하나(HANA)'에 몸담았다. 여기서 한국인 남자친구를 만났다. 8년 가까이 사귄 끝에 2015년 백년가약을 맺었다. 스즈키씨는 우리말 발음이 어눌하지만 어휘력은 보통 외국인들보단 풍부하다. 그럼에도 "더 배워야겠다"며 한국어학당을 다니고 있다.


고교생 모임에선 이따금 역사 탐방을 떠나기도 했다. 어느 날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나눔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옥선 할머니가 자신이 겪은 세월을 담담하게 풀어냈다.


이옥선 할머니는 이역만리에서 3년을 보냈다. 열다섯 나이에 군인 손에 붙들려 중국 옌지로 끌려갔다. '위안소'라 부르는 곳에 갇혀 날마다 벌거벗은 몸뚱이를 상대했다. 관리인은 피임을 도와준다는 구실로 '위안부'들에게 수은을 먹였다. 심지어 일본군은 소녀들을 비행장 활주로 닦는 공사에 동원하기도 했다. 할머니의 말씀 토막마다 충격으로 다가왔다. 가슴이 먹먹할 뿐이었다. 


"일본인과 한국인, 재일코리안들이 동아시아에서 같이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되려면 역사 문제를 부인할 수 없어요. 오히려 이를 드러내놓고 같이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스즈키씨는 그날 이후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쏟게 됐다. 회원들은 2006년부터 매년 5월마다 주한 일본대사관 앞 수요집회 현장을 찾는다. 이에 대해 스즈키씨는 "일본의 헌법이 시행된 때가 1947년 5월이다. 이달에 맞춰 여기에 와서 '우리는 평화를 원하고 있다'는 걸 알리는 한편 한국 시민들과 같이 연대해서 문제를 해결하자는 차원"이라 밝혔다.


"할머니가 원하는 건 '평화'... 일본 국회의사당 앞에 소녀상 세워야"


▲2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중학동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제1284차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수요시위' 참가자들이 소녀상을 에워싼 채 인도에 앉아 있다. ⓒ 박동우



작고 깡마른 몸집의 여인이 집회 현장 앞뒤를 바삐 오갔다. 그는 연방 스마트폰 카메라 버튼을 눌렀다. 9조련 사무국장 기세 게이코(65, 일본 가나가와현 가와사키)였다.


기세 게이코 사무국장은 '위안부' 피해를 겪은 할머니들을 두루 만났다. 박옥선 할머니, 이옥선 할머니, 이용수 할머니 등 여럿이다. 지난 2012년과 2015년 두 차례에 걸쳐 강일출 할머니를 만나 우애를 다진 경험도 있다. 기세씨는 이른바 '평화헌법'을 수호하는 책무가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해결과 맞물려 있는 사안이라고 본다. 


"할머니들은 자신이 당한 힘든 경험을 앞으로는 누구라도 겪지 않도록 하기를 원합니다. 할머니들이 원하는 건 '평화'예요. 전쟁이 '위안부 문제'를 빚었습니다. 우리는 평화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일본 정부의 시선은 싸늘하다. 지난 연말 부산 일본영사관 앞에 '위안부 소녀상'이 세워지자 기시다 후미오 외무장관이 나서 "유감"을 표했다. 올 2월엔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이 기자회견 자리에서 "지금까지 '위안부의 소녀상'이란 표현을 해왔지만, '위안부상'이라고 얘기하는 게 알기 쉬운 게 아니냐"며 딴지를 놨다. 이를 두고 "말도 안 된다"며 목소리를 높인 기세씨는 "오히려 소녀상을 일본 국회의사당 앞에 세워야 한다"고 꼬집었다.


"일본 언론, '위안부' 피해자 배후조종 단체로 정대협 지목"


▲2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중학동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제1284차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수요시위' 참가자들이 소녀상을 에워싼 채 인도에 앉아 있다. ⓒ 박동우



방한단장으로서 자리를 함께 한 호시카와 가즈에(70, 일본 사이타마현 니이자)는 "일본에 소녀상이 세워질 가능성이 거의 없다"며 '위안부 문제' 해결을 둘러싼 시민운동의 현실적 어려움을 토로했다. 중앙정부와 지자체의 훼방은 차치하더라도 우편향 일색인 언론 생태계가 '기울어진 운동장'을 조성하고 있다는 게다.


"일본 미디어는 '위안부 피해자들의 70%가 보상금을 받은 만큼 사실상 끝난 문제'라고 보도합니다. '보상금을 받기를 거부한 피해자들에 대해선 정대협 등 일부 여성단체가 악의를 갖고 배후 조종을 한다'고 묘사합니다."


이날 수요집회 자리는 청소년과 대학생들이 가득 메웠다. 몇몇 청년들은 뒤편에서 서명운동을 벌였다. 충북 청주에서 올라온 두 여중생은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한 김복동 할머니에게 전달할 안개꽃 다발을 한아름 안고 있었다. 호시카와씨는 그런 모습을 '에네르기'로 함축했다.


"우리들은, 일부에 불과합니다. 진짜 소수파예요. 나이 든 어르신들만 아베 정권 반대에 나서고 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한 한국 수준까지 도달하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한국은 청년들이 주축이 돼 활동하는데, 일본은 젊은 사람들 가운데 보수적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부러워요. 한국의 '에네르기'를 받아서, 그 힘을 받아서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돈만 준다 해서 문제 해결 안돼... 일본 정부, 성실하게 사죄해야"


▲햇볕이 내리쬐는 2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중학동 옛 일본대사관 앞에 자리잡은 소녀상에서 기세 게이코(첫줄 맨 오른쪽), 스즈키 유코(뒷줄 맨 왼쪽), 호시카와 가즈에(뒷줄 왼쪽에서 두번째) 등 '헌법9조 세계로 미래로 연락회(약칭 '9조련')' 회원들이 기념 사진을 찍었다. 분홍 나비, 보랏빛 나비가 넘실대는 현수막이 이채롭다. 현수막엔 "한일 ‘합의’는 해결이 아니다. 우리들은 평화와 인권을 위해서 걷는 할머니들과 함께 나아가겠습니다"는 글귀가 우리말과 일본어로 쓰여 있다. ⓒ 박동우



아베 정권이 요지부동인 사이, 한국엔 새 정부가 들어섰다.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 시절 공공연히 일본군 '위안부' 합의를 둘러싼 재협상을 공언했다. 그는 지난 3월 5일 부산에서 열린 북콘서트에서 "일본의 법적 책임과 공식 사과가 담기지 않은 합의는 무효이며, 올바른 합의가 되도록 일본과의 재협상을 촉구하겠다"고 말했다. 호시카와씨의 생각도 마찬가지다. 


"돈만 준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일본 정부가 화해치유재단 계좌에 10억 엔(약 100억 원)을 보냈다고 해서 책임이 끝나는 게 아니다. 피해자들 앞에서 성실하게 사죄해야 한다. 어느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건데 그걸 안하는 게 문제다." 


집회가 끝났다. 9조련 회원들은 소녀상을 둘러싸고 단체사진을 찍은 뒤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서울 마포구 성산동의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 대구 중구 서문로1가의 '희움 일본군위안부역사관', 부산 동구 초량동 일본영사관 앞 '소녀상'을 둘러보자니 가만히 있을 여유가 없었다.


박동우 기자 pdwpd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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