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시선 0023, 정창준 시집 <아름다운 자>
정창준 지음│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
167쪽│1만원│2018년 7월16일 서점 입고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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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준 시인이 이번에 펴낸 시집 첫머리에 있는 시 《아버지의 발화점》. 201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작.
2009년 용산 참사를 글감으로 풀어 지었다.
철거민의 남루한 삶, 그 속에서도 면면이 제 삶을 지키려는 이들의 외로운 싸움을 담담한 필치로 그려냈다.
아버지의 발화점 / 정창준
바람은 언제나 삶의 가장 허름한 부위를 파고 들었고
그래서 우리의 세입은 더 부끄러웠다. 종일 담배 냄새를
묻히고 돌아다니다 귀가한 아버지의 몸에서 기름 냄새가 났다.
여름 밤의 잠은 퉁퉁 불은 소면처럼 툭툭 끊어졌고 물묻은
몸은 울음의 부피만 서서히 불리고 있었다.
올해도 김장을 해야 할까. 학교를 그만둘 생각이에요.
배추값이 오를 것 같은데. 대학이 다는 아니잖아요.
편의점 아르바이트라도 하면 생계는 문제 없을 거예요.
그나저나 갈 곳이 있을지 모르겠다.
제길, 두통약은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남루함이 죄였다. 아름답게 태어나지 못한 것,
아름답게 성형하지 못한 것이 죄였다. 이미 골목은 불안한
공기로 구석구석이 짓이겨져 있었다. 우리들의 창백한
목소리는 이미 결박 당해 빠져나갈 수 없었다. 낮은 곳에
있던 자가 망루에 오를 때는 낮은 곳마저 빼앗겼을 때다.
우리의 집은 거미집보다 더 가늘고 위태로워요.
거미집도 때가 되면 바람에 헐리지 않니. 그래요.
거미 역시 동의한 적이없지요. 차라리 무거워도
달팽이처럼 이고 다닐 수 있는 집이 있었으면, 아니
집이란 것이 아예 없었으면. 우리의 아파트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고층 아파트는 떨어질 때나
유용한거에요. 그나저나 누가 이처럼 쉽게
헐려 버릴 집을 지은 걸까.
알아요. 저 모든 것들은 우리를 소각(燒却)하고
밀어내기 위한 거라는 걸. 네 아버지는 아닐 거다.
네 아버지의 젖은 몸이 탈 수는 없을 테니. 네 아버지는
한 번도 타오른 적이 없다. 어머니, 아버지는
횃불처럼 기름에 스스로를 적시며 살아오셨던
거예요. 아, 휘발성(揮發性)의 아버지,
집을 지키기 위한 단 한 번 발화(發火)
*조세희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화법을 인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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