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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방의 문화생활/책 모아보기

‘내 말’을 끈덕지게 - <카페 만우절>(양선희, 나남,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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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너의 목소리가 들려>의 민준국(정웅인 님) 또한 누군가의 세 치 혀로 큰 고통을 입었고, 그 때문에 그만...

(출처 : 티스토리 블로그 '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내 말’을 끈덕지게


3년 전 이맘때, 나는 동료들과 독립언론 <국민저널>을 창간했다. 의욕이 넘쳐 대학본부의 비정규교원 채용 계획, 교양강의 수업료 폭리 의혹 등의 특종을 연달아 보도했다. "도대체 여기 배경이 어떻기에 자신만만하게 기사를 내는지" 궁금한 이들이 많았나 보다. 뜬구름 잡는 소문들이 줄을 이었다. 쟤네들은 야당한테서 돈을 받는다더라. 종북세력이 <국민저널>을 만들었어. 학교 신문방송사 체육대회 때 사내 선·후배 사이로 뵌 적 있던 직원 선생님이 학보사 기자들과 함께 한 술자리에서 "주사파 신문을 이기자!"는 건배사를 외쳤다는, 서글픈 이야기도 들려왔다.


말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원래 말은 나와 너를 잇는 소통의 매개 도구다. 각자 말로써 사유하고, 생각의 바탕을 '표현'으로 풀어낸다. 잘만 활용하면 '된 사람'이 될 수 있는 자격을 얻는다. 그런데 내가 겪은 말은 '권위'를 반영했다. 나와 당신의 관계가 동등하거나 내가 당신보다 낮은 존재라면, 비아냥거림을 듣거나 모멸감을 받는다. 만일 내가 당신보다 우월한 존재라면, 존중을 받고 찬사를 얻는다. 권력 관계의 맥락에 따라 말이 달라진다.


"상대방의 말을 편견 없이 듣는다"는 주장이야말로 편견이다. 김년균 시인이 쓴 시 「새의 말」에 등장하는 새는 나뭇가지에 앉아 "짹짹짹 째르르, 째르르 짹짹" 하고 울음을 낸다. 이를 두고 '이승을 엿보는 늙은 시인'은 "세상은 참 아름다워라! 눈만 뜨면 즐거워라!"로 알아듣는다. 아무리 대상을 객관적으로 관조한들 머릿속엔 '주관'이라는 프리즘이 있다. 팩트는 있으되 너머의 '진실'은 오리무중이다. 황혼에 물든 것이 선인지 악인지 헷갈리는 시공간 언저리에 있다.


소설 『카페 만우절』의 중심인물 민은아 작가는 자신의 친구, 선배, 지인을 자처하는 이들의 세 치 혀 때문에 한평생 고생했다. 아무나 자빠뜨릴 수 있는 '쉬운 여자'라더라. 제 어미는 남편하고 불화를 겪어서 해외로 유학 갔지, 아마? 민은아는 사람들이 "내가 지금 거짓말하고 있다"고, 유일하게 진실을 고백한다는 이유로 '만우절'을 좋아한다. 거짓말로 들어찬 입들의 세상에 그녀는 '소멸' 내지 '침묵'이라는 방식으로 답한다. "말이 사람에게 해코지를 하며 달려드는 세상에 내 언어를 남겨두고 싶지 않다"며 유작이 된 희곡 <초희> 원본을 삭제했다.


민은아의 '침묵'은 샤를 드골의 말마따나 "약자들의 피난처"에 불과하다. 말은 자기 존재를 투영한다. 화자의 어조, 즐겨 쓰는 어투, 단어 선택 등에서 화자의 성격, 가치관, 잠재의식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그런 말이 소멸된다면? 자기 존재의 소멸이다. 이는 또 다른 형태의 굴종이다. 이후의 '나'는 야만성 가득한 자들이 규정하는 '나'가 대신한다. 정신을 차리고 둘러볼 적의 '나'는 다수의 이기적 욕망에 포획된 애처로운 짐승에 불과하다. "소리로라도 소통을 하려는 사람인데, 초고를 불태울 리 없다." "남편이 개입했을 거다. 그는 민은아가 아내라는 게 밝혀지지 않길 바라는 '샌님'이다." 말은, 그렇게 한층 진화된 소문으로 "생성되어서 창궐"한다.


말에서 해방되려면 온전히 '내 말'의 세계를 끈덕지게 붙들고 있는 결기가 필요하다. <국민저널>이 악의적 소문에서 벗어나려면 불편부당한 시선을 어느 당사자건 오롯이 적용해야겠다는 게 내 결심이었다. '학교와 싸우는' 운동권 동아리라 해서 봐주지 않았다. 등록금 협상 국면에서 힘을 똘똘 뭉치지 않고 독자 노선으로 일관하려는 태도를 정면 비판했다. '학교와 유착할 수 있는' 학생대표자라 해서 무조건 까지 않았다. 참신한 행사 기획에는 긍정적 평을 내리고, 예·결산의 엄격한 관리를 선언했을 때는 "올바른 방향"이라 진단했다. 기사들이 누적될 때마다, 학생사회를 배회하던 '소문의 유령'은 차츰 사그라졌다.


두 눈 또렷이 뜨고 어둠이 자욱한 산길을 걷겠다. 돌부리에 채일 수도, 짐승의 포효에 겁을 먹을 수도 있겠지만 겁먹지 않는다. 어떻게든 ‘내 말’을 전하다 보면 그 목소릴 듣고 누군가는 같이 걸으러 올 것이고, 마침내 첫새벽의 여명이 비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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