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국회 인턴의 돌직구, '욜로족'에 왜 꼰대질이람?
[벼랑끝 청년빈곤 ④] '월130만원' 수진씨가 저축 포기한 까닭은
"저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 많으니까 다른 사람들과도 이야기 나눠 보세요." 한 청년이 인터뷰 내내 되풀이한 말이다. 새로운 사회의 출발선에 발을 내디딘 지금, 우리 청년세대의 절망은 짙고 깊은 골짜기에 있다. '88만원 세대'는 어느새 '77만원 세대'로 전락했다. 중산층 붕괴의 소용돌이에서 부모의 가난이 자식에게로 전이된다.
가중되는 취업난의 복판에서 청년들은 저임금 비정규직으로 밀려나고, 그나마도 '하루살이 인생'인 단순노무직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청년들이 숨 쉴 틈이 있어야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고, 건강한 사회로 가는 길을 개척할 수 있다. 동시대를 사는 청년들의 목소리를 듣고 쓰기로 했다. 문제 해결을 모색하려면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 기자 말
▲정수진(가명)씨는 지난해 여름 일본으로 휴가를 떠났다. 저비용항공사(LCC)에서 내놓은 특가 항공권을 요긴하게 썼다. 새해 들어선 나홀로 제주도를 여행했다. 한라산 등반에 성공했다. 하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을 만끽하는 순간이 행복하단다. 단 한 번 주어지는 인생이므로. ⓒ pixabay
유력 정당의 국회의원 사무실에서 인턴으로 일하는 정수진(가명·26·서울시 등촌동)씨는 지난해 여름 일본으로 휴가를 떠났다. 저비용항공사(LCC)에서 내놓은 특가 항공권을 요긴하게 썼다. 새해 들어선 나홀로 제주도를 여행했다. 한라산 등반에 성공했다. 하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을 만끽하는 순간이 행복하단다. 단 한 번 주어지는 인생이므로.
그러나 수진씨의 삶을 깊숙이 알지 못하는 이들은 표면만 본다. 막연하게 '재산 많고 돈 많은 사람' 취급한다. 그의 일자리는 주5일 근무에 야근까지 붙는다. 월급은 세후 130만 원 수준이다. 아르바이트와 계약직을 전전하던 시절 벌던 것보다 10~20만 원 더 많이 받는 데 그쳤다.
그는 자신을 정의 내린다. '욜로(YOLO·'You only live once'의 줄임말로, '인생은 한 번뿐이니 현재 행복을 추구하며 살자'는 의미)'에 충실한 삶을 살고 있다고. 취업 포털 잡코리아가 운영하는 아르바이트 포털 '알바몬'에 따르면, 최근 2030세대 73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 44.4%가 '나는 욜로족'이라 밝혔다.
상당수 어른들은 '돌체 비타(Dolce Vita·달콤한 인생)'나 '케세라세라(Que Sera Sera·될 대로 되라)' 따위의 용어로 욜로를 규정짓는다. 화려하고, 사치스럽고, 향락에 빠진 삶. 수진씨는 젊은이들을 흘겨보는 기성세대에 일침을 날리고 싶었다. 인터뷰를 자청한 이유도 남달랐다.
"제 욜로 라이프는 가난에서 기인했어요."
그는 늘 의문을 품었다. 어른들은 왜 현실이 어려우면 오늘도, 내일도 열심히 일하라는 충고를 건네는지. 행색이 남루한 청춘에겐 여가생활과 자기계발을 할 권리는 없는 건가.
"엄마는 돈 아껴서 해외여행이라도 가봤어?"
어머니는 자식이 여행 가는 게 탐탁지 않았다. 틈나면 "돈도 없는데 왜 자꾸 여행을 가냐"면서 "조금이라도 돈 모으라"고 당부했다. 그럴 때면 "돈 없다고 돈 없이 지내면 더 가난해진다"며 "나는 거지가 되더라도 거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받아쳤다. 언젠가 수진씨는 잔소리에 지쳐 홧김에 독설을 내뿜었다.
"엄마, 그렇게 돈 아껴서 지금까지 한 번이라도 해외여행 가봤어?"
어머니의 가슴을 후벼 파는 말이었다. 부모님은 푼돈을 모아서 한 푼 쓰기를 두려워했다. 늘 가난에 쩔쩔맸다. 그게 현실이었다. 1990년대 수진씨 아버지는 식당에 물티슈를 납품하는 사업을 벌였다. 그땐 벌이가 제법 쏠쏠했다.
호의호식으로 지내는 것도 한순간이었다. 1997년 외환위기는 가족의 생계에 직격탄을 날렸다. 경기도 안산 상록수역 인근에 자리 잡은 50평짜리 아파트를 팔았다. 이후 도시 변두리로 떠났다. 이사 간 집은 허름한 빌라였다. 옛집과 견줘보면, 크기가 확 '쪼그라든' 집이었다.
가까이에 저수지가 있었다. 흘러나온 물은 실개천과 만났다. 여섯 살 수진씨는 "집 근처에서 물고기를 잡을 수 있다"며 기뻐 폴짝 뛰었다. 그때 어머니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가장으로서 권위를 회복하고 싶었던 아버지는 물러서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돈을 긁어모았다. 2000년대 지인들과 철강업에 투신했다. 하지만 사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인명 사고가 일어났다. 장년 노동자가 용광로를 살피다 그만 발을 헛디뎠다. 쇳물에 빠져 죽은 것이다. 공장은 개업 1년도 안 돼 문을 닫았다.
잇따른 사업 실패로 잔고가 바닥났다. 온 가족이 생업 전선으로 내몰렸다. 수진씨는 열세 살 무렵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제 용돈을 마련할 요량이었다. 해본 아르바이트 종류는 전단지를 배포하는 일부터 고깃집에서 음식을 나르는 일까지 다양했다.
모녀가 같은 매장에서 일한 적도 있다. 2009년 수능시험을 치른 직후 수진씨가 대형마트 화장품 코너에서 근무했을 때다. 어머니는 가끔 마트 판매원으로 일했다. 중고령 여성이 고를 수 있는 일터는 적었다. 지난해엔 평일 오후 2시부터 다섯 시간 동안 커튼 코너에 서서 손님들에게 제품을 설명했다. 최저시급을 받았다. 수중에 반찬거리 살 정도의 돈만 쥐었다.
아버지가 사업에 도전하고 실패하고, 재기하는 과정을 되풀이하는 동안 겪은 고초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단다. 2년 전 아내 몰래 사업하겠다고 귀띔했다. 국책은행을 다니는 수진씨 오빠가 통장에 쟁여둔 자금 6천만 원을 아버지가 빼냈다. 그랬다가 '홀라당' 날려 버렸다.
그 뒤로도 아버지는 다단계 사업을 기웃거렸다. 뒤늦게 마음잡고 올 초 막노동을 나갔다. 공사 중인 건물 4층에서 추락했다. 천운으로 살았다. 비계(飛階)에 걸려 땅바닥에 바로 떨어지지 않았다. 갈비뼈 몇 대 부러진 게 끝이다. 당시 수진씨는 사무실에서 일하다가 "아버지가 쓰러졌다"는 연락을 받았다.
"깜짝 놀라서 '어떡하지' 이러면서 아빠한테 전화를 했어요. 병원에 누워 있다고 하는데, '병원비 많이 나오면 어떡하나' 이 생각이 스치는 거예요. 내 자신이 되게 싫어지더라고요."
대학생 때 일주일 3개 알바... 대상포진 앓고, 성추행 겪기도
▲청년빈곤에 따른 고통을 겪는 정수진씨 ⓒ 박동우
2010년 서울 소재 4년제 대학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했다. 가족 형편이 어려우니 의존할 도리가 없었다. 등록금을 제외한 모든 비용은 온전히 제 몫이었다. 줄곧 아르바이트를 했다. 일주일에 두 개 이상의 아르바이트를 하는 건 기본이었다.
주중에는 카페 점원으로 일하고, 주말에는 스크린골프장으로 향하는 식이었다. 한 달 60~70만 원을 벌어 생활비로 충당했다. 그러다 학교 시험 기간이 겹치면 수진씨의 면역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급기야 대상포진에 걸렸다. 온몸이 쑤시고 따가움이 퍼졌다. 바늘로 콕콕 찌르는 느낌이 들었다.
뇌리 저편에서 길어 올린 숱한 아르바이트의 경험들 가운데선 성추행을 겪은 기억도 있었다. 대학교 2학년 때 시내 번화가 당구장에서 한 달가량 일했다. 손님들에게 음료수를 서빙하고, 컵을 설거지했다. 카운터에서 이용료 계산도 맡았다.
출근한 지 며칠 되지 않아, 40대 중반 나이쯤 되는 '실장'이 자길 불렀단다. 실장은 "웃옷 단추를 제대로 잠그지 않았다"고 지적하며 수진씨 가슴에 손을 갖다 댔다. 눈 깜짝할 새 벌어진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까맣게 잊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수업을 마치면 아르바이트를 하러 교문을 나서는 자신과 달리, 밖으로 놀러 다니거나 그대로 집으로 향하는 친구의 모습이 늘 부러웠단다. 미술고를 졸업해 연극영화과에 입학했다가 적응하지 못하고 소속을 옮긴 동기였다. 수진씨는 "학교를 졸업할 때쯤 그 친구는 가족이 운영하는 고급주택 건축회사에 들어갔더라"며 "나도 그 친구만큼 형편이 풍족했더라면 내가 다니고 싶은 학원도 다니고 편한 여건에서 공부했을 것"이라고 울컥했다.
공익요원도 받는 식권, 계약직은 못 받았다
수진씨는 사회복지사를 꿈꿨다. 졸업을 앞둔 2014년 종교재단이 운영하는 장애인복지관에서 일할 기회를 얻었다. 근무기간이 2년인 계약직이었다. 나라에서 기관에 보조금을 쥐여주는 대신 청년 인력의 채용을 권장했다. 그렇게 뽑힌 젊은이들은 어디까지나 금방 쓰고 버려질 일회용품이었다.
수진씨는 기업에 장애인 구직자의 채용을 알선하는 부서에 배속됐다. 각 기업 관계자를 수시로 만나 뽑힌 직원의 업무 적응 실태를 면밀히 듣는 한편 장애인 취업자들의 고충 상담을 진행했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근무했다. 한 달 봉급은 126만 원에 그쳤다. 상여금은 없었다. 사회복무요원(공익근무요원)도 받는 2천500원짜리 구내식당 식권조차 못 얻었다. 점심시간 때면 같은 계약직 동료와 건물 밖으로 나갔다. 근처 편의점이나 식당에서 끼니를 때웠다.
무엇보다 팀원들 사이 '보이지 않는 벽'을 실감했다. 정규직들은 그들만의 세계 안에서 따로 노는 듯했다. 여느 부서면 있어야 할 단체 카카오톡 채팅방의 존재가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들은 비정규직에게 말을 붙이지 않았다. 무기력했다. 외로웠다. 마음에 우울한 공기가 스며들었다.
▲유력 정당의 국회의원 사무실에서 인턴으로 일하는 정수진씨의 책상. 자판 앞에 명함이 수북하게 쌓여 있다. 국회사무처에서 주는 월급은 이전 직장과 다를 바 없었다. 그래도 사회복지 분야와 관련된 입법에 참여할 수 있겠단 생각에 가슴이 설렜다. 하지만 그 기대는 산산조각 났다. 잡무는 고스란히 여성 직원의 몫이었다. ⓒ 정수진
곡절을 겪다 지난해 여의도에 새 둥지를 틀었다. 20대 국회 개원과 동시에 국회 의원실 인턴으로 취직했다. 국회사무처에서 주는 월급은 이전과 다를 바 없었다. 그래도 사회복지 분야와 관련된 입법에 참여할 수 있겠단 생각에 가슴이 설렜다. 하지만 그 기대는 산산조각 났다. 잡무는 고스란히 여성 직원의 몫이었다. 조간신문을 가지런히 탁자에 올려놓고, 의원 집무실 책상을 정리정돈했다. 화분에 물을 줬다. 법률안 발의 협조요청서를 각 의원실에 돌리는 일은 고역이었다.
"의원회관 10층부터 3층까지 'ㄷ'자 형태의 건물 복도를 쭉 돌아다니면 발에 물집이 잡혀요. 슬리퍼를 신고 다니더라도 발이 아프긴 매한가지예요. 그러다보면 '내가 전단지 배포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개원 직후 첫 달은 의원회관 휴게실에서 잠을 청할 만큼 야근이 잦았다. 그러나 자기 성과를 낼 여유가 없었다. 상사들의 일을 돕는데 공력을 들였다. 정책 분야로 역량을 쌓고 싶었으나 기회는 열리지 않았다.
얼마 전 보좌관과 면담할 때 수진씨가 하소연을 늘어놨단다. 정책, 정무, 홍보 등 어느 분야에 특화되지 못한 채 사무실에서 자기만 애매한 위치에 놓여 있다고. 그러자 보좌관은 "비서관을 네 '사수'로 붙여 줄테니 열심히 가르침 받으라"고 약속했다.
하지만 올 초 국회사무처가 국회 인턴의 재직 기간을 2년 이내로 제한했다. 2년을 넘겨 일하는 국회 인턴들은 여의도를 떠나야 한다. 수진씨는 "여긴 누군가가 죽어 나가야 윗자리로 올라갈 수 있는 구조"라며 "사람을 휴짓조각으로 만드는 편법"이라 비판했다. 과연 자신이 9급·7급 비서 자리를 꿰찰 수 있을 것인지 스스로도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승진의 문턱은 높다. 그가 국회에 들어온 지 어느덧 1년이 넘었다.
"저축해도 아파트 못 사... 차라리 하고 싶은 데 돈 쓸래요"
▲매월 130만 원 급여에서 월세 40만 원, 금융권에서 빌린 학자금을 갚는데 30만 원씩 나간다. 남는 돈은 60만원. 이 돈으로 식사, 교통비, 통신비, 옷 구입, 지인들과 모임 비용 등에 쓰고 나면 저축할 돈이 없다. ⓒ pixabay
지난 6월 <한국일보>에선 300여 명 이상의 전국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월평균 지출액을 조사했다. 117만 원에 달했다. 기사 아래엔 '과소비'라는 댓글 일색이었다. 수진씨 친구 중에도 "과장됐다"이라며 혀를 차는 이가 있었다고 한다. 수진씨가 반문했다.
"친구는 차비, 밥값 정도만 생각해서 한 달 30만 원이면 살 수 있다고 생각하더라고요. 그런데 걔 말대로 하려면 친구도 만나지 않고, 문화생활을 포기해야 해요. 그저 숨 쉬고 먹고 자며 하루를 버티는 삶만 살아가야 하죠."
매월 130만 원 급여에서 월세 40만 원, 금융권에서 빌린 학자금을 갚는데 30만 원씩 나간다. 남는 돈은 60만 원. 이 돈으로 식사, 교통비, 통신비, 옷 구입, 지인들과 모임 비용 등에 쓰고 나면 저축할 돈이 없다.
"거의 돈을 쓰지 않은 채 살면 한 달에 30만 원씩 저금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생각해봐요. 1년을 모아야 360만 원이에요. 그렇게 해서 10년을 모아요. 목돈은 3천600만 원에 불과해요. 이걸로 무엇을 하나요? 아파트를 살 수 있나요?"
돈을 모으기 여의치 않은 상황이기 때문에, 굳이 저축하느라 제 살을 깎지 않겠다는 게 수진씨 생각이다. 결혼을 둘러싼 욕심이 없는 것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그는 "결혼을 하면 집을 구입해야 하고, 자녀한테 들어갈 지출까지 염두에 둬야 한다"며 "내 앞가림 겨우 하는데 결혼을 굳이 해야 할지 의문이 든다"고 말했다.
차라리 그 돈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 나의 만족과 맞닿은 대상에 투자하자는 게다. 올여름 드론에 취미를 붙여 다장창신(DJI)에서 출시한 제품을 샀다. 독서를 좋아해 매달 다섯 권 이상의 책을 사고, 신간 서적을 소개하는 인터넷 방송 패널로 고정 출연한다.
생명을 향한 애착도 깊어 집에서 반려동물을 키운다. 햄스터, 앵무새, 토끼를 벗 삼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틈틈이 뒷이야기를 올린다. 수진씨는 사회적 활동에도 열심이다. 청소년 선거연령 하향 요구가 빗발치던 지난겨울엔 국회 앞에서 농성하던 고교생들을 찾아가 함께 팻말을 들었다. 독거노인들을 대상으로 쌀을 배달하는 자원봉사에도 나선 적 있다.
기실 많은 기업과 미디어는 욜로 열풍을 상업주의에 가뒀다. "오늘을 활활 불태우라"며 호텔·리조트 이용을 권유하는가 하면, "제 삶의 가치는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라며 은근슬쩍 최신형 노트북의 장점을 알린다.
유수 언론은 비판에 가세한다. 욕망에 눈멀어 분수 모르고 소비하는 청년들. 불확실한 미래를 대비조차 않는 무책임한 청년들. 자본은 사각의 링에 청춘의 등을 떠밀고, 언론은 기다렸다는 듯 턱에 주먹을 뻗는다.
수진씨는 이런 세상에 '묵직한 패스트볼'을 던졌다.
"사실 욜로족이라 하면 인생을 낭비하는 사람들이라 생각하지만, 인생을 즐기려는 사람들이야말로 자기 삶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한 사람들이 아닐까요? 저는 지금도 고생하는 사람들한테 앞으로도 계속 이 악물고 사서 고생하라고 '꼰대질'하는 어른들이 싫어요."
['벼랑끝 청년빈곤' 이전 기사 보기]
①'가난의 늪' 빠진 청년... "청포도 사탕으로 끼니 때워"
②'조현병'과 '중졸'의 굴레… "계속 살자니 토할 것 같아요"
③연 2천 시간 일하고 병까지, 스물넷 정규직의 '대가'
박동우 기자 pdwpd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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