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사 톺아보기/오마이뉴스

[사회]구청이 부순 '아현포차', 시민들이 다시 일으킨다(17.7.28)

반응형



[사회]구청이 부순 '아현포차', 시민들이 다시 일으킨다

'노점 강제철거 1주기' 앞두고 시민과 함께 <아현포차 요리책> 내는 할머니들


보도블럭을 들어낸 자리에선 흙이 숨쉬었다. 땅에서 쫓겨난 사람들은 폐선 부지 한가운데 상추·방아 같은 잎채소들을 심었다. 예닐곱 평은 족히 넘어 보였다. 그들은 '아현텃밭'이란 나무 팻말을 박았다.


24일 오후, 서울 마포구 지하철 공덕역 근처 경의선 공유지(폐선 부지) 채소밭에서 조용분(73, 서울 아현동)씨가 허리를 숙여 깻잎을 따고 있었다. 오른손에 깻잎 몇 장을 쥐곤 자신이 운영하는 주점 '거인포차'로 향했다.


두 시간여 지났을까. 조씨가 영계백숙과 닭죽을 내왔다. 아이스크림을 팔던 상인을 비롯해 몇몇에게 식사를 거저 대접했다. 내친 김에 기자도 닭죽에 숟가락을 갖다 댔다.


한술 떴다. 묽은, 누런 빛깔 육수 사이로 푹 퍼진 찹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곱게 썬 당근, 양파, 감자 조각이 눈에 들어왔다. 고기는 질깃하면서도 담백했다.


이내 조씨가 자그만 접시에 초장을 곁들인 쓴나물(씀바귀) 무침을 올렸다. "이게 술 마시는 사람들 간에 좋은 거야." 한 젓가락 집어 먹었다. 상큼한 향과 쌉싸래한 맛이 입 안에서 어우러졌다.


▲24일 오후 서울 마포구 지하철 공덕역 근처 경의선 공유지에서 주점 '거인포차'를 운영하는 조용분(73·서울 아현동)씨가 요리한 영계백숙, 닭죽, 초장을 곁들인 쓴나물(씀바귀) 무침. ⓒ 박동우



지금 경의선 공유지엔 아현동 포차거리에서 장사했던 두 할머니가 차린 임시 포장마차가 있다. '작은 거인' 이름을 내세웠던 조씨의 네댓 평짜리 포차, 그리고 '강타 이모집'을 차렸던 전영순(69·서울 용강동)씨의 여덟 평 가게 '코끼리 레스토랑'이다. 이들은 지난해 30년간 생계를 받치던 터전을 잃었다. 재개발로 들어선 대단위 아파트 단지 주민들의 민원 때문이었다.


최근 이들 가게 주방에 사진작가가 다녀갔다. 자신있게 내놓은 메뉴인 오돌뼈, 조기매운탕, 순두부찌개 등의 사진을 찍었다. 할머니들은 채록하는 이들에게 음식 요리법을 술술 풀었다.


아현동에서 밀려난 상인들을 돕는 시민단체 '아현포차 지킴이'의 기획이다. 회원들은 할머니들의 요리 비결을 차곡차곡 눌러 담은 <아현포차 요리책>을 출간하기로 했다. 책 간행 아이디어를 낸 황경하 자립음악생산조합 운영위원은 "단순히 요리책으로 그치지 않는다"며 "두 이모(할머니)의 인생 서사와 함께 단골손님 등 아현동 포차와 얽혀 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실었다"고 밝혔다.


'달동네' 단골들과 함께 만든 아현 포차


▲24일 오후 서울 마포구 종합체육시설 아현스포렉스에서 지하철 2호선 아현역으로 이어지는 도로(굴레방로). 지난해 8월 포장마차 18곳이 자리잡은 속칭 '아현동 포차거리'를 강제철거한 마포구청은 해당 자리에 70여 개의 대형 화분을 놓았다. ⓒ 박동우



"옛날엔 아현동이 달동네라 눈이 오면 마을버스가 도로를 올라가질 못했어요. 포차 거리 있던 데가 버스 정류장이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거기서들 한 잔씩 마시고 올라가는 편이에요. 지금 40대 후반, 50대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우리하고 같이 늙는 거죠. 아현동을 만들어낸 사람들이 우리 포장마차 주인들이에요."(전씨)


아현동은 서울에서도 서민들이 모여 살던 동네로 손꼽혔다. 1930년대 초 굴레방 다리를 중심으로 시장이 생겨났다. 6․25전쟁을 거친 뒤엔 피란민들이 아현고가도로 밑 간선도로에 늘어서 노점상을 열었다.(1971년 12월 6일자 <경향신문>) 아현초등학교 정문에서 불과 20m 떨어진 담 아래엔 쓰레기 적치장이 1992년까지 있었다.


전씨, 조씨를 비롯한 포차 할머니들은 1986년 무렵 오늘날의 굴레방로 일대에 리어카를 갖다놓고 장사를 벌였다. 겨울방학 때 반짝 군고구마 장수로 변신한 고교생들이 버리고 간 리어카를 구했다. 한때 여기엔 큰 규모의 '서강학원'이 자리잡고 있었다. 대학 입시생들을 고객 삼았다. 이들은 떡볶이 노점, 풀빵 장사, 과일 팔이까지 안해본 게 없었다.


할머니들이 포장마차 영업을 결심한 건 1991년 11월의 일이다. 전씨가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노점 규모가 점점 커지니까 장사가 두 줄이 되더라고요. 앞줄엔 야채 장사들이 자리를 잡았고, 우리는 뒷줄이었어요. 누가 뒷줄에 와서 떡볶이를 먹겠어요? 손님들이 뒷줄 가게를 둘러보지도 않고 지나쳤어요. 곰곰이 생각했죠. 그나마 돈을 벌 수 있는 건 포차 밖에 없었어요."


할머니들은 매일 낮과 밤이 바뀐 삶을 이어갔다. 보통 저녁 6시쯤 문을 열었다. 밤을 지나 새벽 4~6시까지 가게 불을 밝혔다. 각양각색의 손님들을 맞았다. <별들의 고향>으로 데뷔한 영화감독 이장호, <칠갑산>을 부른 가수 주병선 등 유명인사들이 90년대 종종 들렀단다.


인쇄소를 운영하는 어느 손님은 조씨에게 '작은 거인 욕쟁이 이모 할매' 글귀를 박은 명함을 선물했다. 할머니는 중매를 서서 두 단골손님의 인연을 결혼으로 성사시킨 기억이 선하다. 포차를 찾아온 비행청소년들에게 공짜로 음식을 먹이고 돌려보낸 경험도 떠오른다. 조씨가 옛 시절을 회상했다.


"서대문에서 미성년자 다섯 명이 왔어. '너희들은 학교 졸업도 안했는데, 이 다음에 커서 완고한 직장을 잡았을 때 이모한테 와서 돈 갚아라'고 말했지."


전씨는 자기 포차를 찾던 20년지기 단골과 막역한 사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포차에 발자국을 남긴 사내였다. 할머니는 청년의 결혼식을 찾아가 축하했다. 청년이 자식을 낳자 "우리 집 손님들 중에서 처음으로 출산 소식을 알려줬다"며 아기 옷을 한 벌 사줬다. 청년은 어엿한 가장이 된 뒤에도 명절 때면 늘 포차를 찾아와 과일상자 선물이나 용돈을 전해주고 갔단다.


'틀니, 단골들 연락처' 챙길 새도 없이 부서진 가게


▲현재 서울 마포구 지하철 공덕역 근처 경의선 공유지에서 주점 '거인포차'를 운영하는 조용분(73·서울 아현동)씨. 그는 지난 30년간 아현동 포차거리에서 '작은 거인' 이름을 내세운 포장마차를 가꿨다. ⓒ 박동우



포차가 문을 닫기 두 달 전이었다. 조씨가 운영하던 '작은 거인' 포차를 찾은 웬 손님이 술을 잔뜩 마시곤 진상을 부렸단다. 당시 포차에 있던 지킴이 황경하씨가 기억을 더듬어가며 말했다.


"나이를 스물셋 정도 먹은 애가 하는 행동이 도가 지나친 것 같아서 밖으로 끌고 나왔어요. 이야기를 나누는데 펑펑 울더라구요. 걔네 엄마 아빠가 부동산 중개업을 했어요. '왜 우냐'고 물으니까 '철거 집행당하기 직전'이라면서 '못 이긴다'고 말했어요. 여기(아현동 포차거리)가 없어질 거란 걸 너무나 잘 안 거에요."


이명박 전 대통령은 서울시장 재임 시절 도시 전역에 재개발의 씨앗을 뿌렸다. 2005년 서울시가 아현동 일대를 '아현3 주택재개발정비구역(아현뉴타운)'으로 지정한 게다. 우여곡절 끝에 3800가구 규모의 래미안푸르지오아파트가 완공됐다. 2014년 9월부터 본격 입주가 시작됐다.


하지만 아파트 주민들은 포장마차를 곱게 보지 않았다. ▲ 학생 안전 위협 ▲ 학생 및 차량 통행 불편 ▲ 교육환경 저해 ▲ 미관상 문제 발생 등을 거론하며 마포구를 상대로 민원을 제기했다. 할머니들은 행여나 주민들에게 책잡힐까 걱정했다.


전씨가 책임지고 가게 앞에 놨던 평상과 가스통을 치웠다. 점포당 100만 원의 비용을 들여 주변 환경을 정비했다. 하지만 그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2016년 1월 주민들은 집회를 열어 포차거리를 치워 달라 외치는 목소리를 높였다.


마포구청이 철거의 불꽃을 피울 즈음 기름을 부은 이는 지역구 국회의원이었다. 더불어민주당 노웅래 의원은 20대 총선을 앞두고 낸 공약집에서 '명품 주거 인프라 구축'을 약속했다. 그 약속의 일환이 "아현초 일대 포장마차 정비를 마무리"하겠다는 거였다.


당시 노웅래 의원은 3선에 도전했다. 전씨는 아현시장 입구에서 유세를 펼치던 노 의원에게 질문을 던졌다. "만약 국회의원에 당선되면 저 포장마차는 어떻게 할 거냐"고. 전씨의 말이다.


"그렇게 물어보니까 '당연히 철거해야죠'라고 단호하게 말했던 사람이에요. 내가 포장마차 주인인 줄 몰랐던 거에요. 그 사람은 표밭을 일구기 위해 그렇게 공약을 건 사람이라고 봐요."


사실 행정당국에서 '불법' 운운한 건 자가당착이나 다름없다는 게 할머니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쓰레기 적치장을 없앤 구청은 1993년 두 줄로 들어선 노점상을 한 줄로 정비했다. 이때부터 포차 할머니들은 매년 도로사용료를 구청에 냈다. 


나중에 '도로점용변상금'으로 용어만 바뀌었을 뿐 사실상 임대료와 유사한 명목이었다는 게다. 특히 전씨는 "2006년부터 본격적인 재개발에 들어갔는데, 8년이란 기간 동안 구청은 어떠한 대안도 제시하지 않았다"며 "우리가 정말 '불법'을 저질렀다면, 그간 이를 용인한 구청은 공범이 되는 셈"이라 지적했다.


구청은 2016년 1월과 6월 두 차례에 걸쳐 자진퇴거 명령을 내렸다. 그해 7월 1일 구청은 행정대집행을 시도했다. 포차 10곳의 문짝을 뗐다. 소동 끝에 18곳 포차 가운데 8곳이 영업을 중단하고 스스로 나갔다. 전씨와 조씨, 두 할머니는 2016년 8월18일 강제철거 당일까지 버틴 이들에 속한다.


전씨의 설명에 따르면, 구청은 포크레인 2대와 100명 이상의 철거인력 등을 동원해 행정대집행에 나섰다. 모두가 각자의 가게에 똬리를 틀고 가만히 바깥을 응시했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주인장 가운데 최고령자이던 87세 할머니는 들것에 실려 나왔다.


▲서울 마포구 지하철 공덕역 근처 경의선 공유지에 자리잡은 포장마차 '코끼리 레스토랑'의 벽에 나붙은 사진들. 2016년 아현동 포차거리 철거 반대 투쟁 당시 상황이 고스란히 녹아 들었다. 특히 오른쪽 맨 아래 사진의 경우, 지난해 8월 아현동 포차거리를 둘러싼 행정대집행(강제철거)을 단행한 장면이다. 연두색 조끼를 입은 이들은 마포구청 관계자들이고, 주황색 조끼를 입은 청년들은 용역업체 직원들이다. ⓒ 박동우



포차 안에서 꼼짝 않던 전씨는 용역들에게 끌려 나올 때 왼손 가운뎃손가락을 다쳤다. 부상 입었던 손가락은 여전히 두툼했다.


"지금도 손가락이 움직여지지 않아요. 아침에 일어나면 통증이 심해져요."


예고 없는 철거는 가게 안에 놔둔 귀중품을 챙길 여유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전씨는 자식들이 맞춰준 틀니를 비롯해 단골손님들의 연락처가 망라된 노트 등을 몽땅 잃었다. 조씨는 비상금을 모아놓던 저금통까지 날렸다. 포크레인은 묵묵히 가게를 부쉈다.


"이승만 박사 때도 인정이 있었는데 지금은..."


▲현재 서울 마포구 지하철 공덕역 근처 경의선 공유지에서 여덟 평짜리 포장마차 '코끼리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전영순(69·서울 용강동)씨. 그는 아현동 포차거리에서 '강타 이모집'을 차렸다. 전씨는 아현포차 투쟁을 이끄는 리더격 인물이다. ⓒ 박동우



두 할머니가 자릴 옮긴 경의선 공유지의 운명도 순탄치 못하다. 지난 2011년 이랜드가 개발 주관사업자로 선정됐다. 회사는 철도시설공단과 계약을 맺고 30년 동안 땅을 빌렸다. 공사에 돌입하면 여기서 장사하는 이들은 오갈 데가 사라진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마포구청은 할머니들을 가만 놔두지 않았다. 식품위생법 위반 혐의를 적용해 고발한 게다. 공원에서 장사한다는 게 잘못됐다는 이유였다. 당국은 전씨에게 50만 원, 조씨에겐 70만 원의 벌금을 내렸다. 이를 두고 전씨는 "수돗물, 전기, 냉장고도 없이 떡볶이 장사하는 노점상은 가만 놔두는 마당에, 냉장고도 설치하고 수돗물 콸콸 나오는 곳에서 음식을 조리해 파는 게 어떻게 식품위생법 위반이 되느냐"며 "그저 약한 자는 짓밟아도 된다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고 분통을 터트렸다.


강제철거 뒤 조씨는 기초생활수급자 신세로 전락했다. 그런데 자식들의 경제적 형편이 여의치 않아, 사실상의 가장 노릇을 하고 있다. 쉰 넘은 아들딸이 지병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5월 마포구청은 아현시장을 중심으로 한 지구단위계획구역에 일부 지역을 편입시켰다. 그가 홀로 사는 아현동 언덕배기 집도 재개발 대상에 올랐다. 오는 12월까지 방을 빼야 한다. 사실 월세가 밀린 지 일 년 가까이 돼서 언제 쫓겨나도 이상하지 않다.


두 할머니가 바라는 건 그저 한 가지다. 강제철거를 둘러싼 책임이 있는 박홍섭 마포구청장과 노웅래 의원이 '공식적인 사과'를 하는 것이다. '해방둥이' 조씨가 갑자기 어릴 적 일화를 꺼냈다.


"우리 엄마는 상인이니까 다른 마을에 물건 팔러 가는데, 모르는 집에서 하룻밤 묵어도 대접을 받았어. 우리 집엔 언니랑 나, 둘만 남아. 어느 날 하늘이 깜깜해지니까 약 장사하는 할머니가 오더라고. 가난 속에서도 우리 언니는 된장찌개를 정성스럽게 끓여서 보리밥과 함께 식사 대접을 했어. 이승만 박사 때까지 그런 인정 같은 게 있었는데, 지금은 도통 이해가 안 돼."


전씨는 자신들이 처한 현실을 '삶의 전쟁'으로 규정지었다.


"이것은 도저히 물러 설 수 없는 싸움이잖아요. 나이 먹은 사람들이 할 수 있단 걸 보여주고 싶어요. 당신네들은 우리를 갖다가 속절없이 파괴했지만 우리는 아직 살아있다고."


투쟁이 길어질수록 인간의 층위가 촘촘해지게 마련이다. 떠나는 사람, 남겨진 사람, 돌아오는 사람. 오늘의 도시 개발 양상은 사람과 '더불어' 가는 것일까.


짙은 밤하늘을 지긋이 바라보던 조씨가 노랫가락을 뽑았다. 1972년 가수 문주란의 발표곡 <공항의 이별>이었다.


"하고 싶은 말들이 쌓였는데도 / 한 마디 말 못하고 헤어지는 당신이 / 이제 와서 붙잡아도 소용없는 일인데..."


※<아현포차 요리책>을 내기 위한 크라우드펀딩의 경우, 텀블벅 홈페이지에서 '프로젝트 밀어주기'를 클릭하면 되며 내달 5일 마감한다. 모금액은 책 제작과 아현포차 할머니들의 투쟁기금을 마련하는 데 쓰인다.


박동우 기자 pdwpdh@naver.com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