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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방의 문화생활/영화 모아보기

<미드나잇 인 파리>(2011) - 지금의 삶도 그런대로 의미가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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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2학기 학교 과제 제출 감상문입니다.


누구든 사람은 지금 자신이 처한 현실에 머무르는 걸 따분한 일로 바라본다. 그러나 시대를 옮겨 보자. 늘 동경하던 환상이 현실이 됐을 때, 그것은 다시 지루한 현실로 채색된다. 경제적 풍요로움 덕분에 낙천적 분위기가 흐르고 힘찬 시대적 에너지가 넘치던, 이른바 ‘황금시대’. 우디 앨런 감독은 이 시기의 파리를 찬미하고 그리는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가 개봉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까. <우디 앨런: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다큐멘터리가 극장에서 선보였다. 시공간을 초월하는 구조였다. 산만하고 복잡한 구성에 혀를 내둘렀다. 우디 앨런 감독의 <미드나잇 인 파리> 작품은, 환상과 몽환적인 요소를 듬뿍 가미했다.


과거에도 우디 앨런은 현실과 환상을 종종 거론했다. 1997년 펴낸 <우디가 말하는 앨런>이란 책을 살펴보면, 스티그 비에르크만과 대담한 자리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 영화 속에서 늘 이상화된 삶의 위대함, 또는 환상과 괴로운 현실 간의 대결에 대한 느낌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음을 느낀다”고.


파리한 외양과 비루한 실상 앞에서 움츠러드는 인간들은 그럴수록 한껏 옛 영광스러운 나날을 자랑하고, 그 시절 아름다움을 뽐내고, 전시한다. 그걸 현실을 살아가는 동력원으로 삼는다. 감독은 인간의 심리 저변에 깔린 정서를 길어 올렸다. 우디 앨런은 “불행하게도 현실이야말로 우리가 맛있는 스테이크 요리를 먹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라고 지적했다. 맞는 말이다. 진정한 즐거움, 기쁨은 곧 현실의 콘텐츠와 빚어낸 감정에서 기인한다. 과거의 문화 유산도 오늘 세계 안에서 작동하는 게다. 우디 앨런 감독의 영화적 상상력은 그래서 앞으로도 무궁무진하게 활용되고, 작품을 창조할 여지가 충분하리라.




내 별명 '1892 박서방'이 떠올랐다…50년대 명동, 96년 신촌 가고파


지난 금요일 밤, 학교 근처 지하세계 카페에서 맥주를  한 잔 곁들인 뒤 집에 돌아왔다. 아무도 없는 빈 방. 여섯 평 남짓되는 작은 방. 울적한 마음에 등려군이 1987년 내놓은 노래 <이별의 예감>을 들었다. 버블 호황을 구가하던 1980년대~1990년대 한국과 일본을 주름잡던 대중문화는 나의 안식처다. 대학교 들어와서 붙은 별명이 ‘1892’‘박서방’이다. 옛 신문 기사를 즐겨 읽고, 당대 가요와 사회상을 둘러싼 관심이 깊기 때문에 빚어진 이름이다.


1930년대 경성으로 돌아가, 종각과 황금정(명동) 일대를 둘러보고 싶었다. 시인 이상이 운영하던 ‘제비’ 다방 문을 열고 들어가, 당대 모더니즘의 선두 그룹을 형성한 구인회 소속 작가들과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다. 1950년대 전후 명동 일대로 거슬러, 박인환 시인, 김수영 시인을 만나고 싶었다. 하다못해 1996년 신촌 일대로 돌아가, 독수리다방에서 커피 한 잔 마시고 ‘연대사태’로 화염병과 최루가스가 난무하던 백양로 일대를 둘러보고 싶은 마음도 스쳤다.


<미드나잇 인 파리>도 바로 그래서 냉큼 호감이 갔다. 매스컴은 끊임없이 오늘날 트렌드에 맞춰 취향을 구축하라 강요한다. 아니, <영웅본색> 같은 옛 홍콩 영화 좋아하면 안되나? 소비와 연계해 현재의 생활양식을 설계하는 지금의 문화 현상에 신물이 나던 차였다. 각자의 정서가 흘러간 것에 초점을 맞췄다 하더라도,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다”고 봐주면 안되는 것일까.


현재 삶도 가치 있는데…펜더 태도에 마냥 공감 어려워


3년 전이었나.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 <어벤져스 : 에이지 오브 울트론>에서 서울의 곳곳이 스크린에 선보였다. 세빛둥둥섬, 강남 대로. 하지만 난 유독 문래동 철강소 골목의 낡은 이미지가 좋았다. <중경삼림> 영화 속 번잡한 ‘청킹맨션’ 건물의 모습이 연상됐다. 신비스럽고, 모험적 요소가 그득한 공간 말이다.


낭만이 숨쉬던 파티장은 어느새 24시 세탁소로 바뀌어 있었다. 풍경이 변하듯 나 자신도 변했다. 옛적 간직한 지성과 꿈, 지키는 게 쉽지 않다. 그 과정은 과거를 둘러싼 예찬으로 오롯이 귀결돼선 안 된다. 과거를 통해 끊임없이 현재를 바라봄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이네즈가 바람 피운 것을 그의 탓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 과거만을 동경하며 현재를 등한시한 길 펜더의 책임도 없다고 말할 순 없다.


백년가약을 약속한 연인을 ‘속물’로 바라보는 길 펜더의 태도에 온전히 공감할 수 없었다. 현재를 사는 이는 그 나름대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현재의 삶에서도 가치가 창출되고 의미가 주조된다. 길 펜더는 그 점을 간과했다. 자신이 쓴 시나리오가 영화화돼 대중에게 깊은 감정적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고, 정서적 위로를 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 게다.


과거를 사랑하는 나조차도 현재를 직시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퇴보 뿐이라는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 공포를 이겨내기 위한 또 다른 욕망이 생긴다. 결국, 일시적으로 현실의 괴로움을 벗어나는 도피처에 불과하다. 우리의 안식처는 미래에 있다. 미래를 위해, 인간은 끊임없이 삶의 지루함을 인내해야 한다. 인내 속에서 슬픔도, 사랑도, 기쁨도 있는 법이다. 순간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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