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가난의 늪' 빠진 청년... "청포도 사탕으로 끼니 때워"
[벼랑끝 청년빈곤 ①] 어머니가 20년 된 차 있다는 이유로 기초수급자도 못 돼
"저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 많으니까 다른 사람들과도 이야기 나눠 보세요." 한 청년이 인터뷰 내내 되풀이한 말이다. 새로운 사회의 출발선에 발을 내디딘 지금, 우리 청년세대의 절망은 짙고 깊은 골짜기에 있다. '88만원 세대'는 어느새 '77만원 세대'로 전락했다. 중산층 붕괴의 소용돌이에서 부모의 가난이 자식에게로 전이된다.
가중되는 취업난의 복판에서 청년들은 저임금 비정규직으로 밀려나고, 그나마도 '하루살이 인생'인 단순노무직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청년들이 숨 쉴 틈이 있어야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고, 건강한 사회로 가는 길을 개척할 수 있다. 동시대를 사는 청년들의 목소리를 듣고 쓰기로 했다. 문제 해결을 모색하려면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 기자 말
▲실업자는 아니지만 사실상 실업자로 여겨지는 취업준비자가 사상 처음으로 70만명을 넘어섰다. 이날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 5월 기준 비경제활동인구 중 취업준비자는 73만5천명으로 전년 동월(65만6천명) 대비 13%(8만5천명) 증가했다. 사진은 지난달 15일 오후 중구 서울시청년일자리센터. ⓒ 연합뉴스
수도권 3년제 전문대를 다니는 이대윤(가명·25·부천 원미동)씨가 내민 손을 맞잡아준 곳은 제3금융권 대부업체였다. 2학년 1학기 무렵, 러시앤캐시 장학재단에서 장학생을 선발한다기에 냉큼 교수의 추천을 받아 지원서를 넣었다. 현금으로만 300만 원을 손에 쥐었다. '행복 나눔'의 이름을 단 장학금이었다.
역설적이게도 그의 발목을 붙잡은 곳 또한 대부업체다. 어머니가 밀린 공과금을 낼 요량으로 대윤씨의 이름을 빌려 '대학생 대출'을 받은 것이다. 24.9%의 이자율을 조건으로 두 군데서 1500만 원을 빌렸다.
국가장학금을 생각 안 한 것은 아니다. 신청했지만 아르바이트에 갇힌 삶은 학업을 뒷전으로 밀었다. 한국장학재단에 신청해봐야 성적 기준(직전 학기 평균 B학점 이상)에 못 미쳤다.
매달 아르바이트로 버는 돈은 들쭉날쭉 제각각이다. 원리금을 상환하는 데 다달이 25만 원을 쓴다. 대윤씨는 "신용불량자인 어머니의 은행 계좌가 정지돼 있는 데다, 나보다도 돈을 못 벌 때가 있다"며 "매달 내는 돈이 아깝긴 해도 한꺼번에 갚을 목돈이 없으니 어쩌겠느냐"며 허허거렸다.
그는 차라리 나라에서 집안이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것을 공인해주길 바랐다. 고민하다 어머니에게 말을 꺼냈다. 차상위계층이나 기초생활수급자 신청을 해보자고. 한부모 가정이니까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고.
세무서로 가서 소득금액증명원을 뗐다. 어머니 소득이 한 해 600만 원에 그치는 것으로 나왔다. 그런데 뜻밖의 문제에 부닥쳤다. 몇 년 전부터 의류 원단과 기성복을 업계에 배송하는 일을 하고 있는 대윤씨 어머니에겐 자동차가 꼭 필요하다. 그래서 20년 전에 나온 중형차를 몬다. 차량의 내구성이나 현재 가치로만 따지면 '마티즈'보다 못 나가는 차였다. 하지만 국민기초생활보장 지침을 근거로 두면, 배기량이 1600㏄보다 많은 차량인 탓에 재산 기준을 충족하지 못했던 것이다.
대윤씨 어머니는 1990년대 퍽 이름 있는 의상 디자이너였다. 전용 의상실을 둔 채 활발하게 사업을 확장했다. 서울 도심에 건물을 3채나 보유했다. '일찍 터트린 샴페인'을 제대로 맛봤던 셈이다. 옛 사진첩을 한 장씩 넘기면, 젖먹이인 자신이 가족과 함께 유럽, 남미, 북미 등 전 세계를 두루 여행한 흔적이 즐비했다.
운명의 1997년, 외환위기를 맞닥뜨렸다. 이들 가족도 '중산층 가정의 삶이 송두리째 바뀌었다'는, 전형적 서사를 비껴가지 못했다. 채권자들이 벌떼같이 달려들었다. 하루아침에 사업이 망했다. 건물을 잃었다. 사업의 재무·회계를 책임지던 아버지가 대부분의 부채를 떠안았다. 온 가족이 빚의 무게에 눌리는 사태만은 막아야 했다. 선택지는 '이혼'뿐이었다.
그에게 장학금 준 곳은 '러시앤캐시'였다
▲청년빈곤에 따른 고통을 겪는 이대윤씨 ⓒ 박동우
어머니는 파출부, 떡집 아르바이트 등을 하며 살림을 이어나가려 애썼다. 그래 봐야 한 달에 100만 원 안팎 되는 돈으론 가족들의 삶을 지탱하기에 버거웠다. 대윤씨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겹벌이를 하며 생계전선에 뛰어들었다.
야간자율학습이 없는 고교였던 까닭에 수업을 마치는 오후 5시면 쏜살같이 교문을 나서 저녁 내내 아르바이트하는 일상을 반복했다. 전단지를 돌리고, 인형탈을 쓰고서 판촉에 나서기도 했다. 격주로 자정부터 다음날 아침 7시 30분까진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했다.
유독 어른들은 알바를 자처한 청소년들에게 쌀쌀맞았다. 급여 지급이 밀리는 건 예사였다. 이명박 정부 2년 차 최저시급은 4000원이었다. 하지만 노동현장의 사업주들은 2000~3000원밖에 안 되는 푼돈을 줬다. 근로계약서를 썼는지 기억조차 없다. 애초 안 썼으니 기억할 리 없다. 그러나 항의하지 못했다. 노동부에 신고하는 방법과 절차를 잘 몰랐던 데다, 자칫 신고했다간 고용주가 어깃장을 놓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깃들어 있었다.
그가 고깃집에서 손님에게 음식을 갖다 주고 불판을 닦는 일을 할 적엔 어이없는 '협박'을 당하기도 했다.
"고깃집에서 아르바이트한 지 석 달 지난 때였어요. 어느 테이블의 불판을 바꿔주고 돌아서는 찰나에 술 거나하게 취한 아저씨가 '자네 학생 아니냐'며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소주를 더 갖고 오라'는 거에요. 그때는 소주 한 병에 1000원이었는데, 그냥 제 돈 털어가지고 술을 갖다드렸죠."
평일 내내 하루 대여섯 시간씩 일하고 70만~80만 원을 받았다. 10만 원은 동생 용돈으로 떼주고, 나머지는 오롯이 집안 생활비로 쓰라며 어머니에게 건넸다.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한 그해 대윤씨의 동생이 태어났다. 아버지의 이름도, 얼굴도 모른 채 자란 동생은 어려서부터 "아빠가 보고 싶다"는 말을 자주 되뇌었다.
초등학교 시절 언젠가 동생 반에서 '아빠와 함께 하는 수업' 행사를 연 적이 있다. 교실 뒤편에 늘어선 중년 남성들 틈바구니에서 돋보이는 건 어린 대윤씨와 그의 어머니 둘뿐이었다. 그날 이후로 같은 반 친구들이 그의 동생을 향해 "아빠 없는 애"라며 놀려댔단다. 주눅 들고 방황하는 동생을 위해 대윤씨는 형이기에 앞서 아빠이자 가장으로서 책임을 짊어졌다.
"저는 사춘기가 없었던 것 같아요. 질풍노도의 감정을 겪지 않았어요.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간 것도 있었고요. 다른 애들처럼 남들에게 반항하는 모습이 없었어요."
2015년 군을 전역하고 원미동 본가를 찾아갔다. 무심결에 연 휴지통에서 구겨진 딱지 하나를 발견했다. 가스요금을 여러 달에 걸쳐 내지 않아 가스 공급이 중단될 거라는 요지였다. 화들짝 놀란 대윤씨는 어머니를 향해 "어떻게 된 것이냐"며 그간 벌어진 일들을 말해달라고 추궁했다. 밀린 전기·가스요금이 열 달 치나 쌓여 있었다. 수백만 원은 족히 넘어 보였다. '신용불량자' 어머니는 한사코 자기가 갚겠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경제활동에 종사하던 대윤씨가 2년 동안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는 동안 가정의 기반은 산산조각 났다. 신용대출을 받는 것도 모자라 러시앤캐시에서 받은 장학금을 본가에 부쳤다. 편안하게 대학을 다니나 싶었던 그의 바람도 날아갔다.
거의 텅 빈 통장 잔고를 접한 대윤씨의 마음속엔 자괴감, 후회, 암울한 감정이 밀려왔다. 삶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할 것 같은 마음에 대뜸 번개탄을 산 적도 있다.
"장학금을 받았을 때 하늘에서 준 기회라 생각했어요. 그게 바로 사라지고 다시 땡전 한 푼 없게 된 거예요. '등록금을 어떻게 마련하지? 또 학자금 대출을 받아야 하나?'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쉴 여유가 없었다. 주말마다 택배 물류센터 배송차량에 짐을 옮기고 나르는 일을 했다. 첫 주가 지나자 윗몸 전체에 근육통이 번졌다. 몸을 조금이라도 움직일 성싶으면 가슴과 등이 바늘로 찌르듯 저렸다. 그는 파스도 붙이지 않고, 스트레칭을 몇 번 하는 것으로 쑤시는 통증을 감췄다.
일터에서 대윤씨는 막내였다. 대부분 마흔 살을 족히 넘긴 아버지뻘 사내들이었다. 어린 나이에 아르바이트를 한다며 다들 예뻐했단다. 그래서일까, 고마운 기억들이 많다.
날마다 자취방에 데려다주던 아저씨가 있었다. 언젠가 "밥을 잘 챙겨 먹지 못하는 것 아니냐"며 걱정하더니 집 근처 마트에 들러 계란 한 판, 삼겹살 두어 근, 바나나를 사더니 손에 쥐어주곤 제 갈 길을 갔단다. 눈물이 핑 돌았다.
대윤씨는 빈털터리가 돼 거의 한 달 가까이 사탕과 물로만 배를 채운 적도 있다. 처음엔 보름 분량으로 잡고 청포도맛 사탕 한 봉지를 샀다. 아침에 눈을 뜨면 1.5ℓ 생수의 절반을 벌컥 들이켰다. 한꺼번에 사탕 세 알을 입에 털어넣고 혀로 살살 녹였다. 그렇게 삼시세끼를 버텼다. 금세 배고프면 사탕을 집어먹었던 탓일까. 어림잡아 120개 정도 든 사탕 봉지를 일주일 만에 뚝딱 비웠다. 한 봉지에 5000원 정도 했으니, 2만 원으로 배고픔을 달랜 셈이다.
한겨울 영하 17℃까지 기온이 내려간 날이었다. 숨만 쉬어도 수염에 고드름이 맺힐 듯한 강추위였다. 대윤씨가 옷장을 열었다. 늘 입던 패딩점퍼가 없었다. '찢어져서 세탁소에 수선을 맡겼지.' 하는 수 없이 트레이닝복을 여러 벌 겹쳐 입은 채 물류센터로 향했다. 우스꽝스러운 외양이 흡사 만화 주인공 '쾌걸 근육맨'을 연상케 했다. 그렇게 일하는 걸 힐끗 본 몇몇 아저씨들이 패딩점퍼를 거저 줬다. 아들에게 사랑을 쏟는 아비의 부성애가 이런 건가 싶었다.
생계-취업 스트레스가 부른 '돌발성 난청'
▲지난 24일 이대윤씨가 자신이 다니는 학교 작업실에서 졸업작품 제출작을 수정하고 있다. 그는 졸업작품을 게임 회사 취업 준비에 필요한 포트폴리오로 활용할 계획이다. ⓒ 박동우
친구들도 이런 그의 사정을 잘 안다. 대윤씨는 올 2월부터 네 친구가 사는 반지하 주택에 얹혀 지내고 있다. 부엌, 거실, 방 두 칸, 화장실을 갖춘 집은 연세로 600만 원이 든다. 보증금 없이 1년 치 월세를 집주인에게 한꺼번에 낸다. 룸메이트들이 150만 원씩 갹출했다. 보태줄 돈이 없는 대윤씨는 가뜩이나 좁은 공간에서 먹고 자는 것이 미안해서 자는 시간을 뺀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 작업실에서 보낼 때가 잦다.
빚 갚으랴, 생활비 벌랴, 취업 준비하랴 정신이 없다. 다른 동기들은 3학년 과정을 마치고 졸업하는데, 그는 차라리 한 학년을 더 다니기로 마음먹었다. 어정쩡하게 졸업하느니 확실하게 실력을 쌓고 나가겠다는 결심이다.
대윤씨는 요즘 졸업작품 제출작을 다시 매만지는 데 온 힘을 쏟고 있다. '3D 맥스(Max)' 프로그램으로 컴퓨터 게임 속 캐릭터와 사물의 형체를 그리고 다듬는다. 두 발로 걸어 다니는 뿔소의 모습을 한 '타우렌'을 닮은 괴물이 주먹을 휘두른다. '그래픽 디자이너'를 꿈꾸는 그의 손놀림으로 탄생했다. 열세 명의 팀원들이 뭉쳐 다섯 달 동안 판타지 액션 게임을 만들었다.
비록 1등에 오르진 못했어도 포트폴리오로 쓰기엔 딱 좋은 작품이다. 작품에 밴 리소스를 보완하면 게임회사 실무진들이 눈여겨볼 게다. 게임 시연을 영상으로 편집해 제출하면 금상첨화다. 상당수 업체들이 게임 제작 본연의 소질을 갖췄을 뿐만 아니라 마케팅에도 재능이 있는, 소위 '융합형 인재'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중학교 시절부터 컴퓨터 게임이 좋았다. 중세 시대 성채를 배경으로 창병, 궁수 등을 길러내 끊임없이 돌진하는 적군들을 물리치는 플래시 게임을 손수 만들기도 했던 게 대윤씨다. 고교 시절 게임 관련 학과를 가겠다 선언했을 때 어머니는 퉁명스레 반응했다. "학과가 아니라 게임 중독자들의 모임 아니니?" 그것은 자신의 진로를 둘러싼 편견을 내쫓는 싸움의 시작이기도 했다.
인문계 일반고교 1학년 시절 6~7등급 언저리에 있던 내신 성적을 3등급(2학년), 3학년 들어선 1등급 후반대까지 끌어올렸다. 성적이 수직 상승했다. 또래 친구들이 "인간 승리의 드라마"라며 엄지를 추켜올렸다. 수시 1차 전형에서 학생부 성적 등 서류만으로 당당히 합격했다. 학사시스템 홈페이지에 접속해보니 1000점 만점에 998점을 받았다. 입학할 때 총장상을 탔다.
보고 들은 바로는 게임 업계는 학벌로 구직자의 점수를 매기지 않고 오로지 실력 본위로 자웅을 겨루는 곳이다. 지도교수의 세심한 피드백을 거쳐 포트폴리오를 완성하고, 일자리 추천을 받아 직장에 들어가는 게 최적의 시나리오다. 그런데 요샌 초조한 감정이 적잖이 든단다. 졸업작품 1등을 거머쥔 동기들 아홉 명이 골고루 엔씨소프트, 넥슨 등 유수의 기업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마음 같아선 국가 지원과 연계한 직업교육 프로그램을 받아보고 싶은데 기회가 너무 적어서 안타깝다. 친구가 "교육도 듣고 나랏돈도 받을 수 있다"며 소위 '게임 아카데미' 학원 강좌를 권했다. 일정한 출석률을 달성하면 30만 원가량의 지원금을 탄다는 것이었다. 귀가 솔깃했다. 그러나 선착순 신청이 발목을 잡았다. 문턱에도 못 갔다.
그렇다고 인턴을 하자니 실력 향상과는 거리가 먼 일 투성이였다. 제대한 뒤 집안에 문제가 터지기 전까지 두 달가량 광고 회사에서 월 120만 원을 받으며 영상 그래픽 작업 보조역을 맡았다. 실상은 달랐다. 서류를 정리하고 팀의 일정을 관리했다. 광고에 쓸 만한 CG효과의 예시가 될 만한 영상을 수집했다.
쌓인 불안은 몸에 이상을 만들고, 청년의 삶을 갉아먹는다. 2주 전이었다. 별안간 오른쪽 귀가 막힌 느낌이 들었다. 다음 날은 더 먹먹해졌다. 3일째 되던 날부터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음성변조된 것인 양 들렸다. 텔레비전 화면 속으로 들어간 듯한 느낌이었다.
이비인후과에 갔더니 의사가 '돌발성 난청'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예전 같았으면 중년 남성들이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얻는 질병이다. 대학교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보란다. 비루한 신세인 대윤씨는 "그냥 여기서 진료받으면 안되겠느냐"며 복걸했다. 일곱 종류의 검사 가운데 한 가지 검사만 받고 나흘치 약을 처방받았는데 비용이 3만 원 들었다. 모든 검사를 다 받으면 13만 원을 내야 했는데, 생각만 해도 아찔했단다.
빚은 아직도 600만 원이나 남았다. 언제 취직할지 기약할 수 없다. 전역을 앞둔 동생도 곧 있으면 캠퍼스에 복학한다. 등록금을 벌어다 줘야 할 판이다. 괴롭다.
"앞으로 3년 동안은 이 상태가 유지될 것 같아요. 옛날엔 바늘 구멍만큼 보였는데 지금은 아예 보이질 않네요."
박동우 기자 pdwpd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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