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난 물건]너는 나의 즐거움이었다

아남전자 비디오 테이프 레코더 AV-500



▲아남전자 비디오 테이프 레코더 AV-500. 1997년 7월 4일 세상에 나왔다.


아남전자 비디오 테이프 레코더 AV-500,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네게 편지를 쓴다. 그간 어두칙칙한 옷장에서 답답하지 않았니? 옷가지로 가득 차서, 정리를 해야 하는데 마침 네가 눈에 띄더라. 디지털카메라와 컴퓨터가 보편화된 2000년대부터 난 널 쓸 일이 없었어. 그러다 어느 순간 옷장 너른 구석으로 직행했지.


가로 40cm, 세로 34.5cm에 키는 8cm. 톡톡 두드리면 둔탁한 철판 소리가 나는 게 어릴 적 내게 위압감을 줬지. 정가는 34만원인데, 공장출고가는 약 27만원. 요새 온라인몰에 나오는 제품들 보면 3~4만원 안되는 가격에 팔더라. 하긴, DVD 나온 세상에 비디오 찾을 양반들이 어디 있을까. 격세지감이다.


혹시나 비디오 넣다가 손을 찧지는 않을까 싶어 무척이나 조심했는데, 커서 보니 아무 것도 아니더라고. 그냥 단칼에 밀어넣으면 그만이었는데 말이지. 네가 97년 7월 4일생이니 낭랑 열여덟이구나. 풍요 속의 빈곤이라던, 90년대 시절 용 써서 알록달록한 영상들 보여주느라 고생 많았어.


지난날을 돌이키면, 너는 나의 어린 시절과 동고동락했어. 빨간 빤쓰 입고 이리저리 정글을 헤집던 소년 모글리를 보며 눈을 떼지 못했다. 둘리와 함께 알파벳 나라로 여행도 다녔지. 음, 또 뭐가 있었더라? 예능과 드라마를 종횡무진하던 김지호 누나가 동요도 불렀어. 두 눈에 별이 반짝이며 뿅 갔단다. 홍길동 복장을 한 초롱이랑 세종대왕님의 삶을 들여다보던 기억도 나네. 이상우가 부르던 주제가가 워낙 시원시원해서 여러 번 앞부분만 돌려 보기도 했는데.


비디오 안전탭을 열면 홈이 나와. 여기다 휴지를 돌돌 말아서 끼워넣으면 공테이프로 얼마든지 쓸 수 있었지. 그래서 만화 본편이 나오기 전에 광고가 나오잖아? 그 대신 만화 주제가를 집어넣는 재미에 푹 빠지기도 했지. 아빠한테 손으로 툭툭 텔레비전 화면을 가리키며 "이거, 이거" 하면 버튼을 쓱싹 만지더니 녹화가 되더라. 되게 신기했어. 덕분에 슈라토, 리리카, 레츠고형제...많이도 찍었네!


너를 길러낸 아남전자는 외환위기 때 휘청거렸어.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던데, 20년 흐른 지금까지 명맥만 이어가는구나. 적자 규모도 갈수록 늘어나 지난 해엔 80억원이나 손실을 봤대. 부디 따뜻한 볕을 봤으면 좋겠다. 그럼에도 질곡의 세월을 버티고 있음에 고마워. 모진 풍파를 견디고, 시대의 기억이 온전히 이어지니 말야.


두 눈 바로 뜨고 지긋이 너를 지켜 본 게 이번이 처음이야. 네 몸을 이루는 금속 중에도 구리, 은처럼 다시 쓸 수 있는 재료들이 많대. 10여 년 동안 쉬고 있었으니, 이젠 구청에 가서 귀한 쓰임새를 찾길 바랄게. 덕지덕지 먼지 내려앉은 시절도 오늘로 종언을 고했다. 새 삶을 찾아 떠나렴. 안녕.



▲추억의 네 자리 지역국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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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소카와 일본 총리와 '맞짱' 뜨는 YS. 문득 "버르장머리를 고치겠다"던 YS의 사자후가 떠오른다.

출처 : <뿌리의 이글루스> 블로그

http://egloos.zum.com/jampuri/v/4028231


학교 도서관 책장을 찬찬히 살펴보다, 멈춰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정면에 <YS는 못말려>란 책이 있었다. (그가 퇴임한 뒤인 1999년, 2000년의 일이다.) YS 할아버지와 함께 책 속에서 퀴즈도 풀고, 미로 탐험도 했다. 내가 알던, 군림하고 강고한 대통령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우스꽝스런 가분수 머리. 눈은 항상 감은 채 코는 겁나 큰 할배였다.


그는 어릴 적 나에겐 친숙함으로 다가왔다. 으리으리한 청기와집에서 칼국수를 즐겨 먹는다는 얘기가 그랬다. "거제를 '관광의 도시'로 만들겠심니더!"를 발음 한끝 차이로 금기의 단어로 둔갑시켰다는 일화가 구전처럼 떠돌던 것도 그 시절이었다.


고모부는 내가 "대통령 될거에요!" 말하면 "박정희 장군처럼 니도 혁명 함 해봐라!"고 호탕하게 외치던 기억이 있었다. 대통령은 당연히 혁명을 일으켜야 집권하고, 그래야 세상 사람들이 좋아할 줄 알았다. 그런데 꼭 혁명을 일으키지 않아도, 투표를 해서 뽑혀도 사람들이 좋아하는 대통령이 있었다니!


대통령을 갖고 유머를 만들어내도 누가 해코지할 일은 없었다. 그렇게 세상이 한 발 앞으로 나아갔다. 당신은 내 어릴 적 소소한 즐거움을 주었지요. 고마워요. 우리의 대통령.


金泳三

1927. 12. 20 ~ 2015.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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