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사 톺아보기/오마이뉴스

[사회]연 2천 시간 일하고 병까지, 스물넷 정규직의 '대가'(17.7.23)

반응형



[사회]연 2천 시간 일하고 병까지, 스물넷 정규직의 '대가'

[벼랑끝 청년빈곤 ③] 비정규직 전전하다 정규직 됐지만... 은희씨 삶은 '제자리걸음'


"저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 많으니까 다른 사람들과도 이야기 나눠 보세요." 한 청년이 인터뷰 내내 되풀이한 말이다. 새로운 사회의 출발선에 발을 내디딘 지금, 우리 청년세대의 절망은 짙고 깊은 골짜기에 있다. '88만원 세대'는 어느새 '77만원 세대'로 전락했다. 중산층 붕괴의 소용돌이에서 부모의 가난이 자식에게로 전이된다. 


가중되는 취업난의 복판에서 청년들은 저임금 비정규직으로 밀려나고, 그나마도 '하루살이 인생'인 단순노무직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청년들이 숨 쉴 틈이 있어야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고, 건강한 사회로 가는 길을 개척할 수 있다. 동시대를 사는 청년들의 목소리를 듣고 쓰기로 했다. 문제 해결을 모색하려면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 기자 말


▲안은희씨가 지난해 6월 서울의 한 병원에서 받은 신체검사 내역. '초음파검사', '수면 위내시경검사'에 붉은 형광펜으로 칠한 흔적이 보인다. 십이지장과 위 점막이 헐어 있었지만, 어느 병원도 정확한 원인을 알지 못했다. 은희씨는 그저 학습지 회사 지국에서 일하던 시절 받은 스트레스가 주범일 거라고 미뤄 짐작할 뿐이다. ⓒ 안은희



그는 예정된 시각을 20분이나 넘겨 인터뷰 약속 장소에 왔다. 맞은편엔 동국대 일산병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일주일 치 약을 타서 오는 길이었다. 안은희(가명·25·파주 금촌동)씨는 아프다. 벌써 2년 됐다. 구미에 사는 남자친구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온 날일 게다. 별안간 속이 더부룩했다. 먹은 끼니가 위장에 똬리를 틀고 내려가지 않았다.


동네 의원에서 위염약을 처방받아 먹어도 허사였다. 다른 병원에서 내시경 검사를 받았다. 십이지장과 위 점막이 헐어 있었다. 의료기술로 치면 내로라하는 서울대병원을 찾았다. 원인을 물었다. 의사는 모른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더 독한 약을 탔다. 커지는 건 통증의 강도였다. 이유 모를 경련이 함께 찾아왔다.


은희씨는 그저 미뤄 짐작할 뿐이다. 학습지 회사 지국에서 일하던 시절 받은 스트레스가 주범일 거라고. 그는 1년 7개월 동안 정규직 사원 신분이었다. 2013년 5월 입사하고 계약직 2년을 견딘 끝에 딴 열매였다.


일할수록 커지는 건 통증의 강도였다


오전 8시 30분에 출근해서 오후 7시에 퇴근하는 일상이었다. 한 달 가운데 열흘가량은 밤 10시가 돼서야 사무실을 나섰다. 어림잡아 연간 2700시간 이상을 사무실에서 보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2위인 한국 취업자들의 연간 노동시간(2273시간, 2015년 기준)을 훌쩍 뛰어넘는다.


월초엔 학습지 회원을 유치하는 '프로모션(판촉활동)'을 하느라 바빴다. 보험사 영업 활동과 비슷했다. 월말엔 그달의 업무 실적을 결산하고 납부된 회비를 정산하느라 쉴 새 없었다.


그나마 돈을 조금 더 받는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비정규직 시절엔 매달 봉급이 120만 원에 그쳤는데, 업체의 정식 가족이 되니 회사는 다달이 160만 원을 줬다. 은희씨는 줄곧 총무부서에서 근무했다.


맡은 일의 범위는 넓었다. 회의 자료와 파워포인트(PPT) 슬라이드 자료를 만들고, 각종 공문서를 제작했다. 엑셀 데이터 입력을 하는 것도 기본 축에 들었다. 고객의 입회 상담, 홍보 전단지 배포, 사무실 환경미화 작업까지 떠맡았다.


회사는 2015년 매출 6000억 원, 영업이익 547억 원을 달성한 대기업이다. 당기순이익은 595억 원이다. 전년보다 매출액은 1.2%, 영업이익은 6.8% 줄었다. 회사는 비용을 줄이려 안간힘을 썼다. 지난해 회사는 각 지국마다 뒀던 교재실장 자리를 없앴다. 아침 7시부터 낮 1시까지, 날마다 여섯 시간 근무하는 '파트타임' 일자리였다. 사라진 직책의 몫은 고스란히 은희씨에게 쏠렸다.


보통 한 지국마다 40~50명의 교사들이 속해 있다. 다행히 은희씨가 근무한 곳은 수도권에서도 제법 외진 동네였다. 매주 25명의 교사들이 회원 아동들의 학습 진도 현황과 요청할 교재를 손수 기록한 표를 총무부서에 냈다. 은희씨는 이를 모아 내부 통신망에 입력해 필요한 교재들을 본사에 청구했다. 각 선생님이 요청한 교재 종류와 수량에 맞게 배송된 교재를 분류했다. 어림잡아 400권에 육박하는 책더미를 뒤지는 건 고역이었다.


늘 채근하는 교사들이 있었다. "왜 제 것은 빨리 처리 안 해요? 서둘러 해주세요!" 신청한 순서대로 처리할 요량이었지만, 선생님들의 닦달 앞에선 여간 버티기 어려웠다. 심지어는 "진도 현황을 잘못 썼다"거나 "교재를 잘못 요청했다"고 교사가 알리면 쪼르르 교재실로 달려가 해당하는 책을 찾아 따로 빼놓기도 했다.


일이 불어났다.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워지는 업무량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그해 11월 말 사직서를 냈다.


"건강상의 악화 사유로 사직하고자 합니다."


▲지난해 11월 말 안은희씨가 회사에 낸 사직서 중 일부. 그는 "건강상의 악화"를 사유로 퇴사하겠다 밝혔다. 그는 유명 학습지 회사 지소에서 3년 7개월을 일했다. 이 가운데 1년 7개월은 정규직 사원 신분으로 지냈다. ⓒ 안은희



업체는 그에게 후임을 위해 업무 교육 자료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모니터 앞에서 하릴없이 PPT 슬라이드 자료를 만들고 있으니 속에서 울화가 터졌다. 화장실에 가서 '악' 소리를 질렀다.


자신이 입사할 땐 겨우 이틀 인수인계 받는 데 그쳤다. 직장 내부 교육(OJT)은 없었다. 은희씨는 거의 모든 업무를 직접 부딪쳐 가며 스스로 익히거나, 상사에게 물어봤다. 그런데 이제 와서 후임에게 체계적인 교육을 하고 가라니. 사표를 쓴 지 한 달이 넘은 12월에서야 그는 약 4년 몸담은 직장을 떠났다.


정규직으로 일한, 나이 스물넷에 원인을 알 수 없는 만성 질환을 얻었다. 은희씨는 회사를 나오기 열흘 전 페이스북에 글을 남겼다.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이 되면서부터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며 "내가 살기 위해 회사를 떠난다"고 선언했다.


비용절감 때문에 없앤 업무, 고스란히 떠맡아


우리나라 청년 10명 가운데 6명 이상이 어렵사리 구한 첫 직장을 1년 3개월 만에 그만둔다(2014년 5월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 은희씨도 첫 직장에서 1년 일했다. 법무사 사무소에서 총무부서 보조역을 맡았다. 관공서 민원 서류를 발급하는 사이트 '민원24'에 접속해 토지대장을 비롯해 각종 등기부등본을 대신 떼주는 일이었다. 그밖에 간단한 컴퓨터 문서 작업을 하면 됐다. 빠릿빠릿하게 움직인 덕에 편히 지냈다. 하지만 정규직으로 전환될 가능성은 없었다. 한 단계 높은 직급으로 오를 기회가 보이지 않았다.


직장을 옮겼다. 카드사로 갔다. 역시 1년간의 근무였다. 컴퓨터 모니터에 고객의 신용카드 신청서를 띄우고 오·탈자나 잘못 적힌 정보를 골라냈다. 하지만 은희씨는 카드사 직원이 아니었다. 외주업체에 소속된 파견직 신분이었다.


한 번 비정규직으로 일하면 평생 불안정한 직업을 맴돈다. 은희씨는 2월 말부터 유명 멀티플렉스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평일 오후 2시부터 8시까지 여섯 시간 근무해서 한 달 110만 원을 받는다.


근로계약서를 썼다. 사측은 11개월 근무할 것을 종용했다. 이른바 '퇴직금 꺾기' 관행이다. 아르바이트 노동자가 1년을 채우면 사업주는 퇴직금을 줘야 하기 때문이다. 은희씨가 일한 영화관은 위탁업체가 대신 운영했다. 본사는 직접 운영을 꺼렸다. 상업지구와 농촌이 뒤엉킨 소도시에서 영화관을 꾸려나가는 건 비용 부담이 크다고 판단했던 게다.


손님을 응대하는 특성을 감안해 회사는 남자 직원에겐 옥스퍼드 구두 또는 '로퍼' 타입의 검은색 신발을, 여자 직원에게는 스타킹을 신으라 했다. '피복비'라도 받을까 싶었지만, 지시에 따르는 비용 지원은 없었다. 3000원쯤 되는 스타킹을 매달 지갑 푼돈으로 샀다.


"허벅지 부위에서 스타킹이 찢어졌어요. 그런데 치마를 입으면 보이지 않잖아요? 무릎 아래 부분이 찢어지지 않았으면 그대로 신고 일하기도 해요. 새 것을 신으면 아깝기도 하니까."


▲청년빈곤에 따른 고통을 겪는 안은희씨 ⓒ 박동우



피복비는 직원 부담, '퇴직금 꺾기' 횡행


은희씨가 중학교 3학년이던 해, 일산에서 3층짜리 장어구이 식당을 운영하던 아버지의 사업이 기울었다. 200명 넘는 종업원을 거느리던 옛 시절은 신기루였다. 가족은 억대의 빚을 졌다. 채권자들이 빚을 갚으라 독촉했다. 부모님이 이혼했다. 은희씨는 엄마와 남동생, 세 식구끼리 삶을 이어나갔다.


파주엔 LG디스플레이 공장을 중심으로 각종 제조업체들이 여럿 들어와 있다. 어머니는 미술 전공을 살려 중소기업 제품 디자인 일감을 맡았다. 하지만 늘상 외주를 얻는 게 아닌 까닭에 수입은 들쭉날쭉하기 일쑤였다. 한 달에 많아야 160만~170만 원의 벌이론 남매의 학업을 지탱하기 어려웠다.


고교 시절부터 아르바이트에 나섰다. 문학 분야에 흥미가 많았지만, 대학에 들어갈 여유가 없었다. 2011년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다시 학업에 눈길을 돌린 때는 2015년 3월이다. 은희씨는 수도권 4년제 대학 국어국문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먹고 살려고 안간힘을 쓰면 어느새 전공 공부가 뒷전으로 밀려나 있다. 한창 격무에 시달릴 땐 1년가량 휴학했다.


"국어국문과는 제가 원하던 전공이에요. 출판사 쪽으로 가고 싶은데 모르겠어요. 워낙 거기도 경기가 안 좋다보니... 일단 지금은 당장 제 앞에 닥친 생계 문제가 제일 크죠."


반년 뒤 은희씨는 다시 구직시장의 문을 두드려야 한다. 아직 학교를 졸업하지 못했기에 이력서 상으론 '고졸' 청년이다. 약간의 초조함과 불안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믿을 건 한 회사에서 진득하게 근무했던 경력이다. 그러나 또래 친구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기업 채용에 소위 '빽'이 작용한다는 의심을 거둘 수 없다. 


"친구 아버지가 모 재벌 그룹 계열사 상무예요. 그런데 친구가 그 회사 사원으로 취직한 거예요. 실화예요. 걔는 원래 '금수저'예요. 4년제 대학을 나왔는데 전문대 졸업자 전형에 지원해서 붙었다는 얘기가 있어요. '얘는 아빠 잘 만나서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은희씨가 최근 유명 외국계 기업에 지원했다 떨어진 경험을 들려줬다. 고객지원 부서에 지원했다. 120명을 뽑는데 9000명 가까이 지원했다는 후문이다. 이력서에 형식의 제한은 없었다. 성별, 학력을 쓸 필요가 없었다.


업체는 서류 합격자들을 대상으로 25명씩 묶어 3시간 동안 집단면접을 진행했다. 현장에서 조별 과제를 내줬다. 각 조마다 종이를 건넨 다음 '만들고 싶은 가구'를 상상해 접어보라 했다. 가구를 생산하고 판매하는 기업다웠다. 면접이 재미있고 신선한 체험이 될 줄이야.


각 팀의 관리자가 면접관으로 배석한 가운데 세 명의 지원자가 방에 들어가 30분에 걸쳐 개인면접을 봤다. 면접관은 은희씨에게 오로지 직무와 관련된 질문만 던졌다. '어디 사느냐', '형제는 무슨 일 하냐', '결혼은 했느냐'며 개인 신상 묻기에 급급하던 천편일률 면접관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은희씨의 머릿속에 대기업에서 일하고픈 생각은 없다. 긴 노동시간과 밀려드는 업무량을 겪어보고 깨달았다. 그저 "내가 편하게 일할 수 있는 데"라든가, "스트레스를 덜 받고 일할 수 있는 직장"으로 가고 싶단다.


▲7일 서울 은평구청에서 열린 '은평 여성일자리 JOB GO 매칭데이'에서 한 고등학생이 서류를 작성하고 있다. ⓒ 연합뉴스



"스트레스 덜 받는 직장으로 가고 싶어요"


지난 2015년 한국고용정보원이 연구한 바에 따르면, 청년층에서 저임금 근로에 시달리는 이들의 비중(30%)은 5년 동안 제자리걸음이었다. 전체 임금근로자 가운데 27.4%(2010년 3월)에 달하던 저임금 근로자의 비율이 5년 뒤 24%로 내려간 것과는 대조된다. 세상은 질 낮은 일자리로 청년들의 등을 떠민다.


한때 박근혜 정부는 비정규직 근로자의 사용기간을 2년에서 4년으로 늘리려 시도했다. "말도 안 되는 처사"였단다. 기간을 늘리는 게 능사가 아니란 것이다. 


"법이 만들어지는 공간인데, 그 법을 악용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슬프네요."


은희씨는 '비정규직이어도 살기 좋은 세상'이 오기만을 기다린다. 언제쯤 올까.


"저는 오히려 비정규직이 정규직보다 임금을 더 많이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비정규직 자체의 일이 고정인 것은 아니잖아요. 일정 기간 근무해야 하고, 회사 여건에 맞춰 갑자기 잘릴 수도 있어요. 언제 잘릴지 모르는 존재잖아요. 그러니 더 불안하거든요."


박동우 기자 pdwpdh@naver.com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