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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앙 기모띠', 선생님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17.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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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앙 기모띠', 선생님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

[페미니스트 키우기 ①] 초등성평등연구회 교사 3인방을 만나다


'페미니즘 열풍'을 넘어 '페미니즘 유행'이란 말까지 나오고 있지만, 아직 한국 사회에서 여성주의를 말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성차별이 일상에 공기처럼 스며들어있고, 젠더 문제를 터놓고 이야기하는 게 여전히 낯선 문화이기 때문입니다. 가정이나 학교 같은 공간도 예외는 아닙니다. 이런 환경에서 '성평등'의 의미를 제대로 아는 페미니스트로 자라나는 것, 그리고 페미니스트를 키워내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입니다. 각 분야에서 고군분투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편집자말]


의문이었다. 체육 시간 학교 운동장을 제집 마당처럼 뛰노는 이들은 남학생들뿐이었다. 여학생들은 쭈뼛거렸다. 끼리끼리 스탠드 주변에서 흙장난을 치거나, 웅성거리며 수다를 떨 뿐이었다. 늘 그런 상황의 반복이니 서느런 고정관념이 현장을 감았다. '여성의 신체는 약하기 때문에 여성은 체육 활동을 잘하지 못한다'거나 '남성이 여성에게 지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


서울 상천초 서한솔 교사는 묵은 편견을 부수기로 결심했다. 성별에 관계없이 공히 같은 기준을 적용했다. 혼성 달리기 시합을 벌였다. 남학생보다 더 빠르게 결승선에 들어오는 여학생들이 많았다. 몇몇 남학생들이 울먹였다. 한 아이는 대성통곡을 했다. 제자들에게 말을 건넸다. "운동을 잘하고 못하고는 개인의 특성일 뿐, 성별은 상관이 없는 거야." 여자에게 졌다해서 부끄러운 기분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당부였다.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명제들이 있다. 세상을 덮은 장막을 걷어내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사람들이 있다. 지난해 6월 19일 첫발을 뗀 '초등성평등연구회'다. 젠더감수성을 기르는 교육의 방식을 고민하고, 해법을 모색하는 단체다. 회장인 서 교사를 비롯해 인천 학익초 이신애 교사, 수도권의 어느 초등학교에 근무하는 솔리(가명) 교사 등 12명의 회원들이 뜻을 모았다.


지난해 서 교사는 초등학교 5학년 한 반을 대상으로 약 40차시(1600분)에 걸쳐 '성평등 수업'을 진행한 바 있다. 무엇이 그들을 실천의 길로 나서게 했을까? 학부모와 학생들은 그들의 실천에 어떤 마음을 지니고서 동참할까? 연구회가 지향하는 성평등 교육의 목적지는 어디일까? 우리 안의 차별을 극복할 수 있을까? 지난 4일, 서울 서초동의 강남역 10번 출구 인근 카페에서 서 교사·이 교사·솔리 교사를 만났다.


선생님들이 가장 듣기 싫은 말, '앙 기모띠'


"동의 없이 막 (팔을) 잡아당겨서 납치범 같을 것 같다." "여자가 꼭 아름답고 치장해야만 하나? 여자도 박력있을 수 있는데." "여자가 꼭 끌려 다니고 순진하지 않아도 된다." 학생들이 느낀 점을 술술 풀어냈다. 드라마 <상속자들> <후아유 – 학교 2015> <태양의 후예> 등 영상자료를 접했다. 학생들의 눈에 남성이 가자는 대로 다 따라가는 여성, 여성을 꾸짖는 남성, 남성에 의존적인 여성은 분명 성차별적 요소가 덕지덕지 붙은 캐릭터였다.


텔레비전, 컴퓨터를 끼고 산 어린이들의 시선은 자연스레 미디어가 차린 콘텐츠로 쏠린다. '걸그룹'의 전성시대라 칭할 정도로 온갖 여성 아이돌이 즐비하다. 동영상 플랫폼 '유튜브'의 급부상과 BJ(인터넷 방송 진행자) 열풍은 초등학생들의 주류 문화를 탄생시킨 일등공신이다.


이 교사는 "여학생들의 장래희망을 물어보면 제일 많이 나오는 게 BJ, 아이돌, 유튜버(유튜브 영상 제작자)"라고 말했다. 이를 두고 솔리 교사는 "(미국) 슬럼가의 흑인 아동들이 선망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건 농구선수나 래퍼 밖에 없기 때문에 장래희망으로 그 두 가지만 이야기한다"며 "여학생들이 선망의 대상으로 삼을 만한 사람이 미디어에 거의 그려지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초등학교 2~3학년부터 화장을 시작한다는 게 교사들의 후문이다. 대중매체는 아이들에게 새로운 화장법을 가르친다. 유튜브에서 '초등학생 화장', '초딩 화장'이란 열쇳말을 검색하면 3만 9천 건이 넘는 영상들이 쭉 나타난다. 여학생들 상당수가 문방구에서 500원짜리 틴트를 사다가 입술을 물들이거나, 화장품 가게에서 1만 5천 원짜리 선크림 팩트를 구해 볼에 윤기를 낸다.


실제로 2015년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이 펴낸 '화장에 대한 우리들의 인식' 보고서에 따르면, 초등학교 고학년 여자 어린이의 45%가 "화장을 한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서 교사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 뚱뚱하거나 소위 '못 생긴' 여성이 등장하면 굉장히 무시당하는 장면, 또는 그런 여성의 애정표현 때문에 상대방이 소름끼쳐하는 장면이 계속 나온다"며 외모 가꾸기 열풍이 아이들 사이에 번진 배경을 진단했다.


평소 학생들이 쓰는 말의 상당수가 외모와 관련돼 있다. 아이들은 선생님에 대한 호감의 표시로 '선생님, 예뻐요' 또는 '선생님, 오늘은 아이라인 그렸네요' 등의 말을 구사한다. 친구들끼리도 '너 얼굴 작아서 좋겠다', '못 생겼어', '네 얼굴 실화냐' 등의 평가가 오간다.


이 교사는 아이들과 함께 토론하며 학급 규칙을 제정했다. 외모에 대해 말하지 않기, 외모에 대한 칭찬을 하지 않기. 이 교사의 설명이다.


"'너 얼굴 작아서 좋겠다'는 말이 칭찬일지라도 결국 칭찬을 받지 못한 학생에게는 칭찬받은 친구가 선망의 대상이 되거나 자신이 우러러보는 대상으로 비칠 수 있어요. 게다가 칭찬받은 친구에겐 그 말이 외모를 유지해야 하는 규범으로 작동할 수 있기 때문에 외모와 관련된 칭찬은 안 해요."


특히 인터넷 방송은 여성 혐오 문화를 아이들의 마음 속에 단단히 붙들어 매는 공간으로 전락했다. 이 교사는 학생들이 "앙 기모띠('기분 좋다'는 의미로, 포르노에서 자주 쓰이는 표현으로 알려져 있다. - 편집자 주)"라는 말을 내뱉는 걸 접하곤 기겁했다. 처음엔 아이들이 야동(포르노)을 접하고서 인상에 남은 말을 따라한 게 아닐까 했단다. 알고보니 유명 BJ 철구의 유행어였다. 솔리 교사도 "전국의 초등학교 선생님들에게 어린이들이 하는 말 가운데 가장 듣기 싫은 말이 뭐냐고 물으면 1위가 '앙 기모띠'일 거라고 자신한다"며 맞장구를 쳤다.


이런 가운데 서 교사가 내놓은 게 여성과 관련된 욕설을 가려내는 '맨손수업(교재와 교구 없이 진행하는 수업)'이었다.


"문화의 주도권을 유튜브가 쥐고 있고, 거기엔 여성 혐오 정서가 흐르고 있어요. 아이들 입장에선 그것들을 되게 쿨하고 멋지다 생각해요. 학교에서는 거기에 대항할 문화가 있어야 하는데, 전혀 없는 상황이죠. 그나마 국어 교과서에 '선플달기운동'이 나와요. 게시판을 '누리집'이라 부르면서 매체에 대한 감상을 나눠보자 하는데, 대단히 한계가 있죠. 저희가 느끼기에도 되게 촌스러운데, 하물며 아이들은 어떤 감정을 느끼겠어요?"


대중문화를 통해 접한 여성 혐오 정서를 되돌아보는 한편, 어린이들만의 새로운 대안문화를 일구려는 의도였다. "이른바 '범생이'처럼 보이면 안 된다. 이것도 쿨하고 멋져야 한다."(지난 6월10일 서 교사가 쓴 트윗)


그래서 학생들에게 쪽지를 나눠줬다. 평소 쓰는 욕설을 적으라 했다. 욕설이 한데 모였다. 아이들에게 물었다. 친구 사이에 쉽게 쓰는 욕설과, 싸움 직전까지 갈 정도로 매우 화났을 때 쓰는 욕설을 분류해보라고.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아이들은 화가 치밀 경우 '미친 년' '씨발년' '니 애미 창년' 등의 욕을 뱉었다고 답했다. 아이들은 분노의 강도가 진할수록 여성을 다룬 욕설을 쓰고 있었던 게다. 서 교사는 "'씨발놈' '이 놈'은 친구끼리 가볍게 주고받는 농담처럼 쓰인 반면, '씨발년' '이 년'에는 진지한 분노가 깃들어 있더라"며 수업을 회고했다. 그는 욕설을 가려낸 아이들에게 물었다.


"너희는 성차별을 하는 사람들이니?"

"아뇨."

"성차별을 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너희들이 누군가를 여자로 부르면 더 심한 욕이 된다는 거네?"


교실엔 침묵이 감돌았다. 그때 서 교사가 제안했다. 유튜브의 각종 영상 속 욕설 댓글을 찾아 관리자에게 신고를 하자고. 아이들이 흔쾌히 동의했다. 컴퓨터실로 자리를 옮긴 아이들이 저마다 여성 혐오 욕설이 담긴 영상이나 댓글을 찾아 신고하기 시작했다.


평소 그런 성격의 영상을 즐겨보거나 욕설을 두루 쓰던 아이들이 두각을 드러냈다. 어떤 아이는 서 교사에게 이런 말도 건넸다. "요즘 뜨는 BJ가 있는데, 이 사람은 완전 '여혐(여성 혐오)'에 가까워요." 수업시간 학생들은 연대해 여성혐오 문화와 싸운 경험을 가슴 속에 아로새겼다.


인간의 사고를 구성하고, 사회 변동이 응축된 언어는 차별과 위계의 구습이 고스란히 반영된 산물이다. '남녀', '부부' 등 가치중립적인 단어에는 항상 남성이 앞에 오는 반면, '년놈' '암수' 등 부정적이거나 열등한 의미가 숨은 단어에는 늘 여성이 앞에 붙는다. '남중생'이란 말은 없는데 왜 '여중생'이란 말은 통용되는가. 연구회 교사들은 누구나 지나칠 법한 대상을 예리하게 포착한다.


'나의 고통' 자각하고, '타인 아픔' 이해하기


▲초등학교 5학년을 대상으로 한 '비판적으로 영상매체 감상하기' 관련 창의적 체험활동 교수·학습 과정안. ⓒ 초등성평등연구회



성평등 교육은 상대의 처지에 대한 이해와 공감에서 출발한다. 이 교사가 담임을 맡은 반 학생들과 함께 제정한 학급규칙엔 '좋아하면 잘해주기'도 포함돼 있다. 그는 "스토킹의 시작은 어린 시절 '아이스께끼(치마를 들추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을 좋아할 때는 최소한 그 사람이 기분 나빠하지 않는 방식으로 표현을 해야 바람직한 관계가 형성된다고 본다. 좋아한다는 이유로 상대를 괴롭히는 건 용인될 수 없다"고 의미를 풀이했다.


발달단계상 초등학교 저학년 어린이들은 억압에 순응하는 한편 '따라하기(모방)'에 익숙하다. 전통적인 성별 이분법을 '표준'으로 인식하는 아이들이지만, 그만큼 기성세대가 심어놓은 사고에서 벗어날 길이 주어지면 신속하게 그리로 몰려간다는 것이 교사들의 설명이다.


특히 아이들은 성평등 교육을 받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겪은 경험이 차별과 구분에 따른 고통이었음을 자각하게 된다. 솔리 교사가 말했다.


"2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성편견 극복 수업을 하고 난 뒤에 수업 소감을 나눴어요. 어른들이 '넌 왜 여자애가 덜렁대니?'라 물으면 '덜렁대는 것과 여자, 남자인 것은 상관없다'고 대답하겠대요. 어른들이 '남자애가 왜 우니?'라 물으면 '남자라고 꼭 울지 말란 법 없다'고 대답하겠대요. 이미 아이들은 성별 규범 때문에 많이 고통받고 있었어요. 이에 따른 구조적 문제를 비판할 언어를 주면 아이들이 이를 흡수해서 자신의 고통을 설명할 수 있는 거죠."


하지만 고학년으로 올라선 아이들이 처한 상황은 다르다. 몇몇 남학생들은 자신의 남성성을 자랑스러워하고, 기존 여성 혐오 문화에 적극 동조한다. 이들에겐 타인의 아픔을 둘러싼 공감대를 형성할 촉매가 필요하다.


교사들은 이 시기가 발달단계상 추상적 사고와 비판할 수 있는 힘을 얻는 때라는 점을 십분 활용했다. 서 교사는 자기 부모님을 인터뷰한 영상을 초등학교 4학년 아이들에게 보여줬다. 딸을 사랑하지만, 자식을 키우려고 내 직업을 포기하는 게 속상했다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텔레비전에서 울렸다.


어머니와 아버지, 각각의 임금곡선을 그렸다. 아버지의 봉급은 완만하게 증가했다. 어머니는 출산할 때마다 퇴사했다. 다른 회사에 재취업했지만, 예전 받던 임금보다 훨씬 적은 액수를 챙겼다.


아이들에게 물었다. "너희 집은 어떻니?" 한 아이가 답했다. "우리 엄마는 간호사고, 아빠는 의사예요. 저를 낳은 다음에 복직하려고 했는데 동생이 또 태어나서 아직까지 복직 못하고 계세요." 다른 아이는 여자가 더 아기를 잘 돌봐서 어쩔 수 없는 거 아니냐고 나름의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서 교사가 대뜸 말을 던졌다. "우리 반에서 아기를 돌볼 줄 아는 사람 손 들어보세요." 학생 몇 명이 손을 들었다. 서 교사가 질문했다.


"어떻게 알았지?"

"배웠어요."

"응, 그렇구나. 여학생이 배울 수 있는 것을 남학생은 배울 수 없는 건가?"


생각의 혼란을 겪는 어린이들은 그렇게 한 번 더 고민한다. 모성애와 사회적 성취욕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 여성의 감정을 상상하고, 실제로 확인한다. 소위 '유리천장', '성별에 따른 임금 불평등'의 민낯을 깨닫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치 않다.


"엄마가 '게이'는 나쁜 거랬어요"


▲부모의 임금 변화를 나타낸 꺾은선 그래프 자료. 초등학교 4학년을 대상으로, 성별간 임금 불평등 문제 등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성차별 문제를 짚는 수업에 활용됐다. ⓒ 초등성평등연구회



걸음마를 뗀 성평등 교육이 나아갈 길엔 돌부리가 가득하다. 전통적인 성의식 또는 왜곡된 성의식을 지닌 학부모 밑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그 사고회로를 물려받을 가능성이 짙다. 서 교사는 학생 간의 다툼을 놓고 상담한 학부모가 '우리 애가 남자애라 화를 참기 힘들어 한다'며 껄끄러운 상황을 모면하려 한 사례를 거론했다. 그는 "아이만의 책임을 성별의 보편적인 특성으로 돌리려는 것"이라 말했다.


솔리 교사는 여성적인 행동을 한 남자 아이를 놀릴 때 학생들이 '게이냐?'라는 말을 쓰는 것 또한 연장선상에 놓인 문제로 본다. 


"한번은 제가 '게이'라는 단어를 놀리는 말로 쓰는 이유를 물어봤죠. 그랬더니 돌아오는 대답이, '엄마가 게이는 나쁜 거라고 했다'는 거예요. '엄마와 선생님 사이에 의견이 다르군요' 이러고 끝났는데, 그렇게 되면 그 학생은 나중에 그 말을 또 쓰게 되거든요."


성인지적 관점을 반영한 어린이 도서가 너무도 적거니와 학습용 교재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는 점도 아쉽다. 연구회 교사들이 모여 도서 목록을 만들 요량으로 서점, 도서관을 수없이 드나들었다. 최소한의 수준으로 잡았던 스무 권에 훨씬 모자랐다. 목록을 만들기가 민망한 현실이었다.


지난 4월 계간지 <창비어린이>가 연 '아동문학과 여성주의' 세미나에선 2013년 어린이도서연구회가 선정한 동화책 161편을 분석한 통계가 제시됐다. 이 가운데 여자 어린이가 단독 주인공으로 등장한 동화는 28편(17.4%)에 불과했다. 남자 어린이가 혼자 주인공을 맡은 동화(46편·28.6%)에 견줘 보면 낮은 수준이다.


그나마 여자 아이가 나온 주인공으로 나온 동화는 초등성평등연구회 교사들의 기대에 못 미쳤다. 남자 주인공이 나오는 동화처럼 현실의 제약이나 난관에 얽매이지 않고 여자 주인공이 당당하게 모험에 도전하는 이야기를 원했지만 실상은 이와는 거리가 멀었다. 열두 살 소녀가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경기 연습을 하며 사춘기 성장통을 이겨내는 동화 <롤러 걸> 빼고는.


서 교사는 "대개 이야기의 주제가 따돌림, 관계나 연애와 관련돼 있다. 상당수 히트작들이 가족과의 관계, 친구와의 관계, 선생님과의 관계 등 나의 관계가 망가졌는데 이를 좋게 만들고 싶다는 내용이었다"고 평했다.


연구회 교사들은 직접 어린이 도서를 쓰기로 계획을 잡았다. 한 교실에서 일 년 동안 벌어지는 다양한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그려서, 학생들의 공감을 모으겠다는 생각이다. 이 교사가 자세하게 구상을 풀었다.


"저희가 초등 교사니까 교실에서 수집할 수 있는 사례도 많고, 아이들이 무엇에 흥미를 갖는지도 알아요. 각 장마다 외모, 신체 변화, 성인이 됐을 때의 진로 선택, 진로 선택에 따른 경력 단절, 그 과정에서 모성애가 어떤 방식으로 강요되는지, 아이들이 시청하고 향유하는 콘텐츠에 깃든 문제점 등을 줄거리로 엮을 수 있겠죠."


'12.8세'에 첫 경험 갖는데 '올바른 성관계' 가르치지 않는 공교육


▲초등학교 저학년을 대상으로 두 어린이와 그에 맞는 옷을 고르게끔 하는 그림 자료. 여성과 남성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동기유발 학습에 쓰였다. ⓒ 초등성평등연구회



지금의 공교육 현장엔 2015년 교육부가 6억 원을 투입해 연구한 결과물이 있다. '학교 성교육 표준안(지도안 포함)'으로, 성교육의 가이드라인 역할을 지닌다. 학생의 발달단계별로 종합적이고 전반적인 이해가 깃든 성교육을 하겠다는 취지였다.


연구회는 이에 대해 분석 작업을 시행한 바 있다. 인터뷰에 나선 교사들은 이를 두고 "쓰레기"로 규정지었다. 솔리 교사의 호흡이 가빠졌다. 


"여성주의적인 언어로 말하자면 성별 이분법적이고요. 조손가정, 다문화가정, 한부모 가정을 고려하지 않은 채 반복적으로 4인 가족(부모와 두 자녀)이 등장하는 등 '정상가족 신화'를 강화하고 있어요. 성 엄숙주의를 강화하고 있고요, 특히 여성에 대해서만 성적 억압이 심합니다. 게다가 성폭력에 대해선 '피해자 비난'을 하고 있어요."


가장 논란이 되는 지점이 성폭력 대목이다. '강간'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설명하지 않는 등 성폭력의 개념을 모호하게 서술한데다, '친구가 원치 않으면 만지지 않는다'는 정도로 언급함으로써 성폭력이 얼마나 나쁜 행위인지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폭력을 피하는 방법만 나올 뿐, 막상 그 일이 닥쳤을 때 피해자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재하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이 교사는 "외국에선 성폭력에 직면했을 때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가르친다. 성폭력을 당하지 않는 방법만 가르치면 아이들은 막상 그 상황이 닥쳤을 때 적극적으로 저항할 수밖에 없고, 그러다 죽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서 교사는 "성폭력을 당한 아이에게서 '내가 따라가지 않았더라면', '내가 싫다고 크게 말했더라면'이라는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도록 교육이 짜여 있다. 피해자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아이와 관계 형성이 미약한 아이라면 상대방에게 혼날까봐 두려워서 말을 꺼내지 못할 것이다. 무엇보다 성폭력에 대해 다루면서 성폭력을 해서는 안 된다는 교육을 하지 않는데, '성교육 표준안'을 제대로 된 교육으로 볼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수업에 앞서 학생들의 동기 유발을 꾀하는 방식도 현실과 매우 동떨어져 있다는 평이다. 이 교사는 음란물 예방 교육 사례를 끄집어냈다. '음'으로 시작하는 단어 말하기, '란'으로 시작하는 단어 말하기, '물'로 시작하는 단어 말하기. 이러한 방식을 권한다는 것이다.


"음악, 란제리, 물총. 세 단어를 주고 공통점이 무엇인지 물어요. '음'으로 시작해요. '란'으로 시작해요. '물'로 시작해요. 정답이 뭘까요. 음란물이랍니다. 일반인이 봐도 웃음이 나올 법한 내용이죠. 굉장히 촌스럽죠. 아무도 그렇게 가르치지 않아요."


인체의 생식기를 이해하는 수업도 실소를 금치 못한다. 학생들에게 '고환', '음경' 등의 이름을 붙이고, 서로 공을 주고받는다. 공을 받은 이는 공을 던질 상대에게 인사를 건네야 한단다. "안녕, 고환아?"


이 교사는 "시작하는 순간 교실이 초토화가 될 것"이라며 깔깔거렸다. 솔리 교사는 "남성 성기인 '음경'과 '고환'은 나오면서 '소음순' 같은 여성의 외부 성기는 가르치지 않는다"며 황당하다는 듯 표정을 지었다.


성관계를 시작하는 평균 연령이 12.8세까지 낮아진 상황(2013~2015년 청소년 건강행태 온라인조사 결과)에서, 표준안은 학생들이 성관계를 맺을 가능성조차 염두에 안 둔다. 교사들은 이른 나이에 성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점을 전제하되, 어떻게 하면 안전한 성관계를 도모할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서 교사는 외국의 사례를 들며 운을 뗐다.


"프랑스에서는 '첫 경험에 대해 상상해보기'라는 주제로 저학년에서 수업을 진행하거든요. 그런데 우리 남자아이들 같은 경우는 첫 경험에 대한 이미지를 '야동'을 통해 얻잖아요. 그 이미지는 '분출'이에요. 내가 콘돔을 끼고 사정해서 상대를 이기고 지배하는 거예요. 내가 사내로서 인정받고 남자로서 존경받기 위한 의식으로 돼 있어요. 그런데 첫 경험은 그런 게 아니잖아요.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 준비 과정을 거쳐 굉장히 로맨틱하고 아름다운 경험으로 승화해야 하는 거예요."


이 교사도 '어린이들을 성적 존재로 바라보지 않는' 표준안을 비판했다. 


"많은 여자들이 첫 경험을 치른 뒤 죄책감을 느껴요. 저는 처음에 '엄마'를 생각했어요. 내가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못하고 파괴당했다는 느낌인데, 남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잖아요. 여자들은 내 것을 남자에게 줬다, 바쳤다는 식으로 생각하게 되는데, 그러면 안되는 거죠. 사랑하는 사람끼리 서로 하는 행위인데, 한 사람은 정복감을 느끼고 다른 한 사람은 죄책감을 느끼게 되는 게 일반적이라면, 이는 공교육에서 이야기를 해볼 수 있는 주제죠."


이들은 성교육 표준안이 하루빨리 폐지돼야 한다는 데 중지를 모았다. 현장 교육을 맡은 이의 자율성을 통제하는 데 쓰인다는 이유에서다. 솔리 교사는 "일선 교육청에서 배포 지침을 내고 '동성애' 언급을 하지 말라고 명시한 적이 있다. 예를 들어 학생이 '게이냐?'는 말을 했을 때 게이가 놀림거리, 배제할 존재가 아니라 우리 주변에 있을 수 있는 존재이므로 이해해야 한다고 교육하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는 셈"이라며 고충을 토로했다.


"'모범생'은 고정관념... 여교사는 술·담배·섹스 못하나?"


지난해 5월 '강남역 10번 출구' 인근에서 여성을 상대로 한 묻지마 살인사건은 단체 결성의 동력이 됐다. 초등교사 온라인 커뮤니티인 '인디스쿨'엔 수업 보조자료가 풍부하기로 유명하다. 그런데 성평등 교육, 특히 개중에서도 사회적 측면에서 문제를 다룬 자료는 없었다. 서 교사가 제안 글을 올렸다. 여성 혐오 정서의 확산, 여성 대상 범죄 증가, 구조적 성차별의 심화와 관련해 교육현장에서 적극적인 성평등 교육이 필요하다고. 함께 할 사람을 찾는다고. 서 교사가 단 글은 삽시간에 조회수 2300건을 넘었다. 대다수가 호응하고 응원을 보냈다.


단체를 결성한 뒤 이따금 언론사와 인터뷰한 기사가 인터넷에 선보였다. 그 다음 날 학교엔 항의전화가 걸려오기 일쑤였다. '맨박스(남성을 둘러싼 고정관념)'에 갇힌 남성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여실히 방증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몇몇 남성 교사들이 어깃장을 놓는 것이 가장 뼈 아팠다. 어깨동무하며 우군이 되리라 믿었던 기대가 깨진 순간이었다. '왜 교사가 이런 일을 하죠?', '학생들에게 특정 이념을 주입하는 것 아닌가요?', '아이들의 생각이 자란 뒤에 성평등 교육을 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 토론 교육 제안, 동화책 쓰기 모임을 제안했을 때도 달리지 않던 비판 댓글들이 눈에 띈 게다.


"기존의 맨박스에 더해 학교 내부에서 남성 교사들이 소수라는 점에서 스스로 느끼는 고통이 얹어져 있기 때문에 굉장히 피해의식을 느끼는 거죠."(솔리 교사)


"저는 그래서 더 이해해줄 줄 알았어요. 바깥 사회에선 여성이 소수적 위치에 놓인 성별이고 남성이 주류적 성(性)이라면, 교사집단에선 오히려 남성이 소수적 성(性)이잖아요. 짐을 옮기는 데 동원되거나 때때로 힘든 업무를 맡기도 하니, 여성들이 사회에서 겪는 고통을 이해할 수 있을 줄 알았어요."(이 교사)


초등학교 교사 열 명 중 여덟 명(76.7%)이 여성이다. 그러나 수적 우위가 젠더 권력의 우위를 뜻하진 않는다. 여전히 이 땅의 여교사들은 기성 사회가 주조한 모델을 따를 것을 요구받는다.


기성세대는 술, 담배, 섹스를 멀리하는, 전형적인 모범생의 이미지를 소환한다. 순응적이고 유약할 거란 예단은 막상 교사가 학생을 엄하게 혼냈을 땐 '여교사답지 않게 학생들을 휘어잡는다'는 평가로 연결된다. 서 교사가 속내를 털어놓았다. 


"여교사는 모순적인 요구를 계속 받아요. 성교육할 땐 섹스에 대해 빠삭하게 꿰고 있어야 돼. 하지만 개인적으론 섹스를 알아선 안 돼. 여교사는 모범적인 인생을 살아왔을 거라 기대하는데, 실제 인생이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잖아요. 내 삶을 조각내서 아이들에게 일화로 들려주며 설명을 해요. 그런데 그게 내 삶이 아닌 거예요. 탈권위적이고 평등한 페미니스트로서 약자를 존중하고 싶은데, 이 사회에서 내가 '1인자'로서 권위를 갖지 않으면 오히려 약자를 보호할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거든요."


가부장제의 규범에 찌든 남성들이 여성을 하대하는 행동은 인간이 인간을 상대로 행하는 권력 행위의 말단이다. 상당수 교사들에겐 일상적 경험이다. 이 교사는 지난해 학교 회계 업무를 맡았다. 급식비 등 학부모들이 대는 각종 비용 처리를 살피다 보니, 자연스레 민원 전화가 끊이질 않는다.


전화를 받을 때 그는 꼭 한 마디를 덧붙였다. "교육의 질 향상을 위하여 모든 통화 내용이 녹취되고 있습니다." 유독 반말로 묻거나 대뜸 욕설부터 하는 민원인들이 많았단다. 올해 그 업무는 남자 교사에게 넘어갔다. 몇 달이 지나 물었다. 나는 민원인들 전화로 스트레스 많이 받았는데, 당신은 그런 것 없냐고. 돌아온 대답에 이 교사가 깜짝 놀랐다. '그런 적이 전혀 없었다'고 했다. 남자가 전화 응대를 하자, 폭언을 하는 민원인이 눈에 띄게 줄었다는 게다.


"성평등교육은 '세상을 바라보는 틀'... 사막에 나무 심는 기분"


국책연구기관 '여성정책연구원'에서 지난해 3월 '한국은 누구에게 살기 좋은 나라인가'라는 질문을 던진 결과를 선보였다. 남성 청소년, 대학생, 직장인 집단에서 공통적으로 '2030세대 여성'이 큰 수혜를 보고 있다고 답했다. 이 교사의 표현대로 "자신을 두들겨 팬 대상에게 화를 내지 않고, 가만히 있는 옆 사람에게 화를 내는 격"이었다.


"여자가 좋은 일자리 독차지한다", "여자는 왜 군대 안 가냐", "출산이 벼슬이냐"는 식의 핀잔을 주는 청년들이 눈에 띈다. 여성을 하위의 존재로서 격하시키고, 2등 시민인 양 얕잡아본다. 지금의 어린이들이라고 무사할 것인가. 여성 혐오 문화가 다음 세대에 고스란히 전승될 수 있는데, 두렵지 않은가.


서 교사가 담담하게 말했다. 자신들은 "지고 있다"고. 열심히 가르쳐도 이내 기존의 주류 문화에 포섭돼 다시 성차별적 언행을 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종종 본다. "너무나 미미해요. 패배의 기록을 지금도 계속 봐요."


하지만 성평등 교육을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틀"로 정의 내린 솔리 교사의 생각은 달랐다. 자신들의 활동이 '사막에 나무를 심는 일'과 같다고 밝혔다.


"내가 하는 일이 과연 이 아이의 미래를 얼마나 바꿔 놓을까 하는 의심이 끊임없이 들어요. 사막에 나무를 심어봤자 말라 죽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사막에 나무를 심는 게 선생님들이 하는 교육의 본질이라 생각해요. '내가 나무를 심었기 때문에 사막이 넓어지지 않은 거야'라고 굳게 되뇌죠."


이들이 실천하는 성평등 교육은 어느 범주에도 들어갈 수 없었다. 솔리 교사의 설명을 듣고 나니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수시로 들춰볼 참고서와 같은 것일지도 몰랐다.


"기존에 우리가 옳다고 하는 지식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 있게 해주고, 억압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의문을 제기할 수 있게 해줘요. 나아가 여성의 불평등을 뛰어 넘어 모든 불평등과 연결지어 이야기할 수 있어요. 더 평화적으로, 민주적으로, 동등한 처지에서 인간과 인간이 관계 맺는 방법을 고민하는 거예요."


서 교사는 자신을 향해 "매일 실패하는 직업"이라며 혼잣말했다. 그러면서도 "일단 부딪쳐봐야 하는 문제"라는 말을 덧붙였다.


이프섬 감옥에 갇힌 '에드몽 단테스'는 땅굴을 파서 탈출을 감행하다 옆방의 이웃 죄수 파리아 신부를 만난다. 속내를 털어놓지 못한 이들이 조우했을 때의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아직 게임은 끝나지 않았다. 늦은 밤 강남역 10번 출구는 인파로 북적였다.


박동우 기자 pdwpd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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