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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서른일곱 여성 장관, '안연생'을 아시나요?(17.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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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서른일곱 여성 장관, '안연생'을 아시나요?

'사진'조차 없는 제5대 공보처장... 주연 대신 '조연'의 이름을 기억했으면


장관 인사를 둘러싼 말썽이 연일 지면을 달군다. 내친 김에 역대 대통령들의 장차관 인사 명단을 정리하기로 결심했다. 매일 밤 자기 전 예닐곱 명의 학력, 경력, 출신, 성별, 평가 등을 표에 빼곡하게 채운다.


대통령기록관 누리집에서 유일하게 사진이 없는 이가 있었다. '안연생'이었다. 제5대 공보처장이었다. 후신인 문화체육부 누리집을 뒤져봐도 사진란에는 회색 인간의 모습만 박혀 있다. 세간 사람들에겐 전혀 낯선 인물일 것이다. 그나마 아는 이들조차 '안연생'보다 '안중근 의사의 조카딸'로 기억한다. 포털사이트, 연합뉴스 인물정보 등을 들여다봐도 그의 생애를 기록한 정보조차 없었다. 오직 옛 신문 기사들로 조금이나마 유추할 뿐이었다.


▲문화체육부 홈페이지에도 안연생 장관의 사진은 없다. 심지어 여성임에도 남성 정장을 입은 형태로 그려져 있다. ⓒ 문화체육부 누리집 갈무리



중국에서 태어나 상해 복단대학을 졸업, 이후 미국으로 건너갔다. 안 선생은 고미술에 깊은 관심을 지녀, 지식인들은 그를 '조선 도자계의 권위자'로 추켜올렸다. 유창한 영어 실력 덕에 전란 와중에 유엔총회 한국대표단의 일원으로 프랑스 파리를 다녀오기도 했다. 당대 언론이 장택상에게 '국무총리' 직함을 붙일 때 서른일곱 여성 안씨에게는 '안연생양'이라 불렀다.


1953년 초 단 두 달여 짧은 처장서리 재임 기간이었다. 그는 자신의 소임을 묵묵히 해냈다. 어쩌면 그는 '걸크러쉬'의 원조격이었을 지도 모른다. 중장년 남성, 미국 유학파 출신 일색이던 전임 공보처장들과 대비되는 새파랗게 젊은 여성 공보처장. 당대 관점에선 파격이었음에도, 그의 삶은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호명받지 못한 게 어디 고위 관직에 등용된 이들 뿐일까. 장삼이사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설움을 겪었다. 어느 교회의 담당 목사가 들려 준 일화를 소개한다. 


16년 전 첫 담임목사 부임 시절 집사들 이름을 외우는데 열중이었는데, 나이 든 집사 할머니 이름이 '이씨'였다고 한다. 왜 그런고 사연을 들으니 부친이 아기를 보고선 "또 딸이냐?"며 핀잔을 줬단다. 이름 짓기도 한사코 싫다 하는 바람에 할머니의 이름은 성씨만 덩그러니 남았다. 나중에 할머니의 부군이 세상을 떠난 뒤 장례를 치를 때가 돼서야, 그의 자제들이 이름을 지어달라고 교회에 청했단다. 장로와 집사들이 한데 모여 '이은총'이라는 이름을 지어줬고, 며칠 뒤 그 할머니도 부군을 따라 제 이름을 안고서 소천했다는 게 이야기의 고갱이다.


'이씨'라는 이름은 부르기 위한 호칭이었을 뿐, 그의 정체성과 인격을 넓게 담은 이름이 아니었다. 몇 년 전 뇌리에 진하게 남은 인도영화 <굿모닝 맨하탄>이 떠오른다. 영어강사 데이비드가 샤시를 향해 "당신은 기업가(Entrepreneur)"라며 말을 건넨다. 평범한 가정주부 샤시는 자투리 시간을 내어 라두(인도 전통 후식)를 만들어 판다. 하지만 가족은 샤시의 소질을 얕잡아 본다. 'Entrepreneur'란 단어는 단순히 기업가, 사업가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창의력을 발휘해 아이디어를 짜내고, 이를 통해 혁신을 이루는 사람이자, 발명하는 사람을 지칭하기도 하다. 영어강사의 한 마디에 샤시는 한없는 기쁨을 느낀다. 집안에서 하찮게 여기던 일이 비로소 '사업'으로 인정받게 되고, 가치로운 행위로 격상된 것이다.


수많은 나비들이 날개를 퍼덕이지만, 날갯짓은 그저 눈에 스칠 뿐이다. 수많은 사투와 노력이 그저 순간의 몸짓으로 옷깃을 스친다. 무대의 배경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기억한다. 용상 뒤의 병풍으로 취급된 사람들의 존재를 길어 올린다. 유리천장에 막혀 좌절한 이 땅의 여성들이 그랬고, 당당히 업적을 일궈 냈음에도 통념과 편견에 밀려난 소수자들이 그랬다. 제 성과를 '자기 것'이라 감히 부르지 못하고 직장상사에게 헌납하는 수많은 인턴과 신입사원들이 존재한다. 


그들의 이름이 호명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우리들 각자의 존재는, 그 자체로도 반짝반짝 빛나므로.


박동우 기자 pdwpd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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