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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세월호, 운 나쁜 사람 얘기 아닌 우리 이야기였다"(17.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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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세월호, 운 나쁜 사람 얘기 아닌 우리 이야기였다"

[세월호 3주기] 안산 세월호 합동분향소를 미리 찾은 시민들을 만나다


▲  2017년 4월14일 오후 세차게 내리던 비가 물러간 뒤 세월호참사 희생자 정부 합동분향소 전경. ⓒ 박동우


"그날 우리 반은 자치회의를 했어요. 어디로, 어떻게 수학여행을 갈 것인지 이야기를 나눴어요. 근처에 있는 가평 엠티촌으로 가기로 했죠. 학교 수업이 일찍 끝나서 친구들과 다 같이 엑소 콘서트 티켓팅을 하러 PC방으로 향했어요. 저는 그때 웹서핑을 하고 있었는데, 포털 실시간 검색어로 처음 봤어요. '진도 여객선 침몰'을."


14일 오후 12시쯤 경기도 안산 세월호 참사 희생자 정부합동분향소를 찾은 전새연(18, 남양주시 호평동)씨는 참사가 일어났던 '2014년 4월16일'의 필름을 머릿속에서 길어 올렸다. 고등학교를 자퇴한 뒤 대안학교 '꿈틀리인생학교'에 다니는 전씨는 앞서 다른 학우들과 함께 '4·16 단원고 기억교실'에 들렀다. 희생된 아이들의 책상엔 환하게 웃음 드리운 사진, 공책 등 유품이 놓여 있었다. 방문객들은 말없이 지켜봤다.


그는 먹먹한 심정을 카메라 뷰파인더에 담았다. 30여 명 전교생이 합심한 '세월호 프로젝트' 작업의 일환이다. '민주시민교육' 수업을 가르치는 선생님의 제안으로 시작됐다. 관심 분야가 들어맞는 이들끼리 뭉쳤다. 벽화를 그리는 팀, 시나 에세이를 쓰는 팀 등으로 나눴다. 전씨는 영상팀에 들어갔다.


전교생에게 물었다. "2014년 4월 16일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요?" "세월호를 한 단어로 정의하면?" 각자 풀어내는 생각을 화면에 기록했다. 아이들이 보름 넘게 틈틈이 촬영한 영상은 이르면 16일 유튜브에 공개된다.




세월호 참사는 그의 삶에 빚을 얹었다. 생면부지의 언니 오빠들은 죄가 없었다. 그런데 남겨진 유가족들은 왜 고통 속에 살아야 하는가. 불필요한 아픔을 겪는 상황이 이상했다.


1주기를 앞둔 때였다. 문득 지나가는 이야기로 세월호 참사 이야기를 꺼냈다. 남 일마냥 다루는 친구들이 많았다. 당시 중학교 3학년이던 전씨는 학생회 기획부에 몸담았다. 그는 '사건을 이해하려면 공감하는 게 먼저'라는 생각을 굳혔다.


'각자의 시점으로 본 세월호'라는 주제로 친구들과 독백을 썼다. 살아남은 단원고 학생의 입장, 세상을 떠난 단원고 학생의 입장, 잠수사의 입장. 서로가 그들의 삶에 녹아들었다. 마치 그들이 보고 느낀 듯이 이야기를 풀어냈다. 타인의 삶이 나의 이야기로 스며들자, 세월호 참사는 비로소 '우리의 문제'가 됐다.


"저는 유족의 입장에서 본 '4월16일'을 글로 썼죠. 배가 가라앉자 학생들이 무섭다고 문자를 보냈잖아요. 부모님들은 '침착하고 어른들 말씀 잘 들으라'고 답장했어요. 그게 가장 후회된다고 말한 어느 분의 인터뷰 내용을 각색했는데, 안타까웠어요. 누군가 배에서 나오라고 말했으면 살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  2017년 4월14일 오전 세월호참사 희생자 정부 합동분향소 앞에 대형 종이배 모형이 자리잡고 있다. 그 안엔 희생된 이들을 그리워하는 절절한 사연의 편지들이 담겨 있다. ⓒ 박동우


"운 나쁜 사람들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들의 이야기였어요"


올해 '고2'에 접어든 막내 아이가 제주도로 수학여행 간다는 소식을 접한 윤병민 목사(59, 예산군 대술면)는 마음이 편치 않다. 


"알려지지 않은 일인데, 참사가 있은 지 일주일 뒤였나? 예산에 있는 학교에서도 세월호를 타고 수학여행을 가려고 계획하고 있었다고 해요. 운이 나쁜 딴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우리들의 이야기였다는 생각이 들죠."


예동교회 윤병민 목사는 부활절 행사 관계로 세월호 3주기 기억식에 갈 수 없게 되자, 미안함이 들어 혼자 분향소를 찾았다. 참사 뒤 대통령까지 나서 책임자 엄중 처벌과 조속한 진상규명을 약속했으나 빈말에 불과했다. 박근혜 정권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짓밟았다.


유족들은 광화문광장에 천막을 치는 것으로 국가에 대항했다. 윤 목사는 일주일에 한두 번 서울로 올라갔다. 유족들이 털어놓는 하소연을 묵묵히 들었다. 슬픔을 나눴다. 그해 여름엔 기독교계 단체 '전국목회자정의평화협의회' 동료들과 함께 '304인의 목회자들이 모인 추모기도회'를 열었다.


윤 목사는 "매주 금요일 저녁에 광화문에서 세월호 기도회를 진행했지만 한 2년 지나니까 동력이 많이 떨어졌다"면서 "세월호를 향한 인식과 공감의 저변은 확대됐는데, 사람들이 처음에 느낀 분노들이 희석되고 있다"고 말했다.


윤 목사처럼 평일 시간을 쪼개 지방에서 올라온 대학생이 있었다. 대구교대 초등교육과 3학년 문다현(가명·22, 대구시 대명동)씨는 세월호 참사 이후 분향소를 방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고백했다. 버스를 타고서 두 시간 반 걸려 도착한 천안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천안을 거쳐 안산으로 한 시간 더 달리는 고생을 기꺼이 감수했다.


문씨는 그간 세월호 참사를 입 밖에 꺼내기가 조심스러웠다. 


"반박을 아예 할 수 없게 만드는 상황들 때문에 이야기를 못하겠더라고요. 목소리 큰 사람들이 '지금까지 계속 기억해야 하냐'는 식으로 나오니까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는 말을 드러낼 수 없었어요."


학교는 불친절했다. 2014년 뜻있는 학생들이 세월호 유가족 초청 강연을 기획했다. 강의실 대관 신청을 했지만, 학생처는 이를 허락해주지 않았다.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면 안 된다면서 행사를 가로막았다. 결국 이 대신 잇몸으로 때웠다. 자그마한 동아리방에 옹기종기 모여 이야기를 나눴다.


박근혜 대통령이 파면됐다고, 세상이 180도 뒤바뀐 것은 아니었다. 세월호 참사 당시 학생들을 구조하다 숨진 선생님 김초원·이지혜씨는 기간제 교사였다. 피어날 생명들을 위해 제 목숨 기꺼이 내던진 스승이었지만, 국가는 "교육공무원법에서 기간제 교사는 공무원으로 분류되지 않는다"며 순직 처리를 거부했다.


내년부터 임용고시를 준비하는 문씨는 "많은 교대생들이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인다"며 "당연히 순직 인정이 돼야 하는데, 기간제 교사와 정교사를 나누며 절차를 따지는 모습은 비인격적"이라고 말했다.


"'엔제나' 생각합니다"는 편지 


참사 후 두 달에 걸쳐 희생자 가정을 일일이 방문한 이호석(41, 신월동)씨. 그는 사회복지사다. 자식의 생사를 확인하려고 전남 진도 팽목항으로 내려간 엄마 아빠의 부재가 길어지는 한 시절이었다. 희생된 단원고 고교생의 어린 형제자매들은 거의 방치됐다.


시흥시 목감동에 자리 잡은 사회복지관에서 일하는 그는 안산 지역 복지관에서 인력 지원 요청이 들어오자 흔쾌히 응했다. 집집마다 찾아가 반찬을 전달했다. 때론 심리 상담을 진행했다. 유족들 중엔 '자살'을 떠올리는 이들이 상당히 많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들의 사연도 심심찮게 들렸다.


"낯빛이 어둡고, 세상이 끝난 얼굴이더라고요. 모든 게 다 끝난 것 같은 표정. 직업적 특성 때문에 어렵게 생활하는 분들이나 사고를 당한 분들을 많이 뵀는데, 세월호 참사 유가족 분들은 훨씬 더 심각했어요."


이씨는 지금까지 대여섯 번 안산 합동분향소를 들렀다. 이번 일주일 동안 복지관은 '세월호 추모주간'을 정했다. 직원들더러 점심시간을 이용해 돌아가며 분향하고 오라고 독려했단다. 이씨는 "어린 아이가 포함된 가족"의 사연이 잊히지 않았다. 특히 권재근씨와 그의 여섯 살 난 아들 혁규군은 미수습자로, 아직 돌아오지 못했다.


한 살 터울 여동생에게 구명조끼를 입혀준 사실이 혁규군을 마지막으로 본 목격담이었다. 혁규군의 영정 앞엔 그의 친척이 쓴 듯한 편지가 보였다. '3년이란, 1천일이란 시간 동안 어린 네가 그곳에 있어서는 아니된다.' 청포도맛 사탕과 하리보 젤리가 우두커니 자릴 지켰다.


엄마 한윤지씨(베트남명 '판응옥타인')는 일찌감치 주검으로 돌아왔다. 제단 아래엔 한씨의 동생 판응옥하인씨가 두고 간 육각상자가 있었다. 직접 쓴 쪽지를 붙여놨다. 볼펜을 꾹꾹 누르며 썼나보다. 글씨의 테두리가 제법 굵고 거칠었다. 삐뚤빼뚤한 만큼, 절절했다. 투박한 만큼, 강건했다. 


'우리는 언니를 기억해요. 엔제나 생각해서 언니야~ 가족들과 행복하게 살아요.'


▲  2017년 4월14일 오전 세월호참사 희생자 정부 합동분향소의 측면 외벽에 물청소를 하기 위한 쇠줄이 걸렸다. 16일 참사 3주기 기억식을 앞두고 새 단장을 하는 것이다. ⓒ 박동우


'안녕 내 친구야' 추모곡 만들고... "작은 관심만으로도 할 수 있는 일 많아"


떠난 이가 좋아했던 음식. 제단에 놓여 있던 햄버거에 유독 눈길이 갔다는 성연영(31, 인천시 용종동)씨는 "살다가 늘 기억은 못했지만, 그냥 보면 바로 울컥함이 번지더라"며 "아직도 사람들의 마음은 완전히 풀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분향을 마치고 자신의 노래가 담긴 음반 한 장을 희생자의 제단에 바쳤다. 해금 연주에 능통한 국악인으로서 자기 재능을 오롯이 세월호 참사를 잊지 않는데 썼다. 성연영씨는 최근 <안녕 내 친구야>라는 노래를 발표했다. 2년 전 투병 생활을 거치며 몸과 마음이 무너진 나날을 되새기며 가사를 지었다. "위로를 받아보니까 위로하는 법을 알게 됐다"고 밝혔다.


"안녕 내 친구야/그동안 많이 아팠지/안녕 내 친구야/그동안 많이 힘들었지/아파하는 너를 보면/생각한 게 있어/어떤 것도 너의 고통을/덜어줄 수 없고/어떤 말도 너의 아픔을/대신할 수 없더라/진심으로 너를 위로하고 싶은데/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어(후략)"


그가 부른 노래는 국악과 클래식을 접목한 문화예술인들이 모여 만든 '세월호 3주기 추모음반 미안(未安)'에 실렸다. 앨범은 오늘(16일)부터 본격적인 판매에 들어간다. 공정 음원 유통 플랫폼 '오대오(www.odaeo.com)'에서 무료로 들을 수도 있다.


치유의 물결은 사소한 행동만으로도 점차 커질 수 있다. 그렇게 조금씩 비극의 무대에 커튼이 내려간다. 성씨와 함께 발걸음을 옮기던 그의 어머니 김정애(가명·67, 인천시 용종동)씨는 얼마 전 페이스북에서 세월호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1인 시위의 주인공을 다룬 기사를 접했다.


돌아오는 월요일 정오쯤 어김없이 명동성당 앞에서 손팻말을 드는 '다섯 아이의 엄마' 오지숙씨를 만나고 싶었다. 가서 잘하고 있다며 등이라도 두드려주며, 밥 한 끼라도 사주고 싶었다. 막상 현장에 가보니, 쉽게 용기가 안 났다. 건물 한 귀퉁이에 숨어서 살펴봤다.


오씨는 한 시간 동안 꿈쩍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한 아이 키우는 것도 숨이 벅차 비명을 지르는 세태에서, 다섯 아이를 키우면서도 시간을 내어 세월호 참사를 잊지 말자고 외치는 모습에 한없는 부끄러움만 받았단다. 걸음을 되돌렸다. 그날 밤 김씨는 오씨 계정에 댓글을 남겼다. "내가 참 부끄럽다"고. 오씨는 "함께 해주는 것만으로도 아주 고맙다"고 화답했다.


찰나의 경험을 들려주던 김씨의 입꼬리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내가 보니까, 어떤 사람들은 음료수도 사갖고 와서 유족에게 건네주기도 하고요. 리본도 갖다놔요. 피켓 통해서 자기네들 전하고 싶은 목소리를 전하기도 하잖아요. 우리가 어느 곳에서든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좋겠어요."


"관여한 사람들이 자기 희생하는 모습 보여야"... 아직 봄은 오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나아갈 길이 멀다고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최명선(가명·59, 안산시 성포동)씨는 해마다 합동분향소를 들렀다. 그는 올 겨울 넘어져 오른다리를 절뚝인다. 목발에 의지해 나홀로 합동분향소로 향했다.


매스컴은 세월호 선체 인양에 쌍수를 들지만, 그것만으로 세월호 참사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거기에 관여했던 사람들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려면 자기 희생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아요. 진실을 밝히려 하는 것 같지도 않고."


장성한 아들딸 덕에 여덟 살부터 두 살배기까지 네 손주를 뒀다. 세월호 참사를 모르는 손주들에게 사건을 둘러싼 모든 진실들을 이야기해줄 마음은 있지만, 착잡할 뿐이다. 


"애들(자식들)한테 그랬어요. '외국에 나가서 살 수 있으면 살아라.' 몰라요. 희망이 없는 것 같아요."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어디까지 바뀔지는 모른다. 지난한 참사의 여파들을 지켜보며 최씨가 깨달은 건 있다. 


"자기 보호를 할 수 있는 걸 (손주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어요. 누구한테도 의지하지 않고 살아라..." 


이날 안산에는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분향소 입구 위를 덮은 흰 천막엔 빗줄기가 연방 떨어졌다. '뚝 뚝 뚜둑 뚜두둑' 요란하게 소리 내며 두들겼다. 14일 안산은 을씨년스런 바람이 에워쌌다. 아직 봄이 오지 않았다.


박동우 기자 pdwpd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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